작가 : | 박영옥 수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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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폭의 찐빵
박 영 옥
찐빵은 나에게 참 정겨운 빵이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고 또 먹고 싶어진다. 세월 따라 많은 것은 변하고 또 변하고 싶어 안달인데 찐빵은 한결같다. 고작, 속에 넣는 앙꼬나 달라졌지 모양도 크기도 별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 어디에 우리네 찐빵만큼 사랑받는 빵이 있을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라도 어울리는 참 소박한 빵이다.
한겨울, 갓 쪄낸 찐빵을 호호 불면서 옹골차게 든 앙꼬와 빵 겉 부분을 적당히 한 입 베어 잘 섞어 먹는 맛은 우리만 아는 비법일 게다. 빵을 다 먹을 때까지 앙꼬를 요리조리 잘 분배해서 베어 먹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
몇 년 전, 울산 어느 골목에서 본 광경이다. 멀리 보이는 가계에서 하얀 연기가 몽실몽실 쉬지 않고 피어오르고 있었다. 찐빵 파는 가계였다. 구름이 되어 흩어지는 하얀 연기 사이로 문득 치마폭의 찐빵이 떠올랐다.
속초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다.
군대를 갓 제대한 막내 외삼촌이 대구에서 올라와 양양에서 양복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외삼촌은 속초로 올라와 우리와 같이 지냈다. 친척이라곤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 외삼촌은 언제나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외삼촌은 나와 동생을 영화관에도 데리고 가고 왕눈깔 사탕도 사 주셨다.
게다가 엄마는 외삼촌이 떡을 좋아한다고 시루떡이나 가래떡을 만들곤 했다.
사실 떡은 외삼촌보다 엄마가 훨씬 더 좋아하셨다.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떡을 깜짝 먹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동생들과 나는 은근히 외삼촌이 더 자주 오기를 바랐다.
어느 해 봄인가 몇 주째 외삼촌이 오지 않았다. 엄마는 걱정되시는지 나더러 외삼촌한테 갔다 오라고 하셨다. 차를 타고 혼자 먼 거리를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약간 겁이 났지만, 용기를 냈다. 버스 정거장 몇 개만 지나면 된다니까.
양양을 지나칠까 봐 잔뜩 긴장을 한 채 버스 제일 앞 운전사 아저씨 오른쪽에 앉았다. 엄마가 버스 탈 때는 앞에 앉아야 멀미를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양양이라는 팻말만 찾고 있었다. 버스 뒤로 스쳐 가는 이정표는 주의를 기울여 읽고 또 읽었다. 고개를 돌려서 확인도 했다.
양양을 지나친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 진땀이 났다. 버스 탈 때 엄마가 운전사 아저씨한테 이미 부탁을 해 놓으셨지만 그래도 나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양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버스에서 내렸다. 안도의 숨을 내 쉬면서.
자그마한 읍내에 외삼촌이 일하는 라사점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외삼촌은 근처 중국식당에서 짜장면을 사 주시고 작은 꽃무늬가 있는 천으로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예쁜 치마도 만들어 주셨다. 새 치마를 입은 나는 매우 기뻤다. 외삼촌은 라사점 일이 바쁘다고 나더러 더 늦기 전에 집으로 가라고 했다. 외삼촌과 같이 올라갈 줄 알았던 나는 다시 긴장되었다.
버스에 올라앉은 나에게 외삼촌은 맛있는 팥 냄새가 솔솔 풍기는 따뜻한 찐빵 한 봉지를 안겨 주셨다. 동생들 얼굴에 피어날 함박웃음에 나는 금세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따뜻한 찐빵 위에는 반짝거리는 하얀 설탕이 넉넉히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따뜻한 빵 위에 뿌린 설탕이 설탕물이 되어 봉지 밑바닥을 삐죽삐죽 찢고 있었다. 찐빵이 버스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외삼촌이 만들어준 예쁜 치마 위에 찢어지는 찐빵 봉지를 얼른 놓고 치마 끝자락으로 고이 감쌌다. 흐물흐물해진 종이 봉지를 헤집고 찐빵의 통통하고 뽀얀 살이 점점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행여 치맛자락이 빵을 짓누를까 봐 안간힘을 썼다. 찐빵 떡을 만들어 동생들 실망하게 하기 싫었다. 그리고 치마 끝자락을 더 말아 올렸다간 자칫 망신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거북이걸음이 되어 어린 가슴을 애태웠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내 치마폭 안에서 삐죽삐죽 찢어지던 봉지 안의 찐빵이 아직도 나를 정겹게 한다.
약력:
부산출생
동래여고 2년 때 미국이민
Patten College 유아교육과 졸업
한국문협 미주지회 회원
쑥 캐는 부부
박 영 옥
쑥은 내게 봄을 알리는 전령사이다.
다른 들나물은 구분 못 하지만 쑥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쑥을 캐는 들판은 내게 전원 교향곡이다. 이른 봄 들판에 서면 나는 시인이고 가인이고 철학가였다. 왠지 가슴이 찐해진다. 내가 알아차리는 것은 코끝에 스치는 아직 남아있는 차가운 공기뿐이다.
속초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다.
2월 말 무렵이면 유독 설악산 꼭대기를 자주 올려다보게 된다. 눈이 녹아야 봄이 열리고 내가 쑥 캐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쑥 담으라고 사준 동그란 대나무 소쿠리는 겨우 내 부엌 살강 위 벽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댕그마니 걸려 있다. 나는 버들강이지 줄기에 좁쌀만 한 새순이 트이면 설악산과 쑥 소쿠리를 번갈아 쳐다본다.
산꼭대기의 흰 눈이 사라진 날은 책 보따리를 집 안에 던지는 둥 마는 둥 나의 마음은 이미 들판에 가 있다. 겨우내 새봄을 기다려준 살강 위의 대나무 소쿠리를 꿰차고 나는 들판으로 내닫는다.
겨우내 웅크리고 지내다 들판에 나서면 그 속에 마음껏 나뒹굴고 싶은 흥분이 일어난다. 드넓은 들판이 나를 감싸 안아 주는 듯하다. 언 땅은 아직 녹고 있고 들판도 아직 마른 검불 색이다. 그러나 나는 논두렁 밭두렁 사이 부스스한 검불 속에 눈에 띌세라 숨어 자라는 새 쑥이 있다는 것을 안다. 행여 쑥 잎이 다칠세라 검불을 살살 헤집고 숨을 죽여 가만히 쑥을 캔다. 밭두렁에 서 있는 뽕나무가 긴 그림자를 내리면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재우쳐 해야 했다. 쑥 바구니엔 엄마가 국 끓일 쑥이 나풀거리고 있다.
미국 살이를 접고 울산에서 잠깐 살 때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재래시장에 나온 어린 쑥을 본 후 나의 쑥 캐는 병이 굼실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번뜩이며 쑥 캐는 동무를 구해 봐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남편을 꼬드기는 일이었다. 느닷없는 쑥 캐는 일에 동원된 남편이 정말 고마웠다. 나의 쑥 캐는 병이 도진 것을 알지 못하는 남편과 쑥이 많이 자란다는 다운 산엘 물어물어 올랐다. 내가 사는 곳에서 별로 멀지도 않고 또 동네 뒤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제때에 오르면 산딸기, 찔레꽃 순, 고사리도 캘 수 있는 옹골찬 산이다. 나는 큰 자루와 남편 몫으로 쑥 캐는 작은 칼까지 준비했다.
다운산 뒤 능선은 여인이 늘어뜨린 12폭 치맛자락과 같이 아름답게 드리워져 있었다. 작은 골짜기를 사이로 만들어진 두 능선에 펼쳐진 푸른 풀들은 우단결 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수십 년 만에 만난 쑥이 있는 들판을 숨을 죽인 채 내려다봤다. 어릴 때 쑥 캐던 속초의 들판이 환등기가 되어 돌아갔다.
능선 위 언저리를 따라 자란 쑥을 캐는 나의 손놀림은 빠르게 느리게 즐거움을 더 해 갔다. 나는 어느 쑥부터 캐야 할 지 마음이 바빴다. 능선의 쑥을 다 캐야 한다. 나는 남편에게 쑥 캐는 재미를 한번 맛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재미있다고 꼬드기기 시작했다. 쑥을 하나라도 캐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라고 설득도 했다.
산꼭대기까지 제법 길게 뻗은 능선 언저리의 그 많은 쑥을 어찌해 보려는 마누라의 당찬 결심에 남편은 걱정스레 능선을 올려다본다. 남편 눈에는 검불 속에 숨은 쑥은 보이지 않는다. 마누라의 빠른 손놀림이 잠깐이면 능선의 쑥은 거뜬히 캐 치울 것 같은 안도감도 준다. 능선 위로 난 길은 산행을 다니는 사람들 외에 외부 인적이 드문 호젓한 길이다.
도저히 쑥을 캘 것 같지 않은 남편이 말했다. “내가 쑥 보따리를 들고 서 있을게.” 쑥 캘 때 보따리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일도 보통 성가신 일은 아니다.
지루해진 남편은 보채기 시작했다. “이 많은 쑥을 다 어쩌려고?”
초등생이 되어 논두렁 밭두렁에서 쑥 캐고 있는 마누라를 남편은 알아차릴 리가 없다. 새아기 첫 친정 나들이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듯 아쉬운 마음 가득한 채 남편과 나는 산에서 내려왔다.
야생 딸기며 찔레꽃 순 그리고 능선에 새 우단결이 깔리는 즈음에 남편과 나는 다운 산에 다시 오르리라. 그때쯤이면 남편에게도 쑥 캐는 병이 꽤 깊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