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배원주 수필가 |
---|
파푸아 뉴기니어 생활
배원주
오늘 DVD를 빌려 영화 ‘아바타‘를 봤다. 이미 본 작품이지만 구상과 화려한 화면 그리고 생생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30여 년 전, 열대지방에서 근무할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원시 부족과 문명인이 자원쟁취 문제로 싸우는 3D입체 애니메이션 영화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근무하고 돌아온 지 2년 만에 1980년대 중반, 파푸아 뉴기니어(Papua-neuguinea) 현장에서 2년 동안 파견근무를 했다.
이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 위도상 적도 바로 밑 남반구에 있다. 호주로부터 독립한 지 그 당시 10년 되었으니 40년 된 신생국가이다. 나는 100여 대의 크고 작은 건설 중장비를 관리책임자로 정글에서 원목을 베어 한국의 목재나 합판 회사로 전량 수출하는 일이었다.
처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에 있었는가. 중동지역은 모래와 석유뿐으로 더운 날씨, 모래바람 등 자연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하지만 여기는 야자수 나무에 맑은 바닷물과 새파란 하늘, 비가 오면 어김없이 쌍무지개가 뜬다. 일곱 색이 하도 고와 한참을 보고 또 봐도 싫증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신기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하늘을 색칠하려면 파란색에 흰 물감을 조금 섞어서 칠하는데, 여기는 파란 원색 그대로 칠해도 될 정도로 새파란 하늘이다.
첫날 부둣가에서 배를 기다렸다. 그런데 물속에 팔뚝만 한 물고기떼 수백 마리가 떼 지어 유유히 가는 것을 보고는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마냥 황홀해했다. 이곳은 말로만 듣던 지상천국,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말이다.
이틀째 되는 날 동료에게 “이런 곳에서 근무하면 봉급 받지 않고 일할 수도 있겠다.”라고 했다. 그 친구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곤란해진다.”고 충고하며 좀 더 있어 보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일주일 지나자, 모든 것이 다 눈에 익숙해지면서 경이로움은 하나씩 평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것이 취미이고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으니, 주말이면 한번 들어오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개인용 컴퓨터가 있거나 휴대전화기가 있는 시절이 아니다. 현장이 정글 깊숙한 곳이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전화했다. 이를 위해 배타고 2시간, 사륜구동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2시간 정도 달려 조그만 도시까지 가야 했다. 그것도 파고波高가 높거나 비가 오면 배가 뜰 수가 없어 가족사진을 보거나 이미 본 테이프를 또 돌리곤 했다. 이랬으니 유일한 소통수단은 열흘 정도 소요되는 편지가 전부였다.
원목 생산 작업의 순서는 먼저 불도저가 들어가서 길을 만들고, 기계톱을 가진 벌목공들이 나무를 베면 불도저, 로다 등 장비로 큰길 옆까지 끌고 나온다. 목재 운반용 트럭(40피트 컨테이너 운반트럭처럼 생긴 트레일러에 나무를 싣게 좌우로 가이드가 되어있음)에 벌목한 나무를 싣고 항구까지 운반한다. 그리고 바지선에 싣고 가서 원목 운반선에 기중기를 이용하여 선적하는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된다. 모든 과정에서 중장비가 운용되고 고장이 나면 생산량과 수익에 바로 직결되어 항상 긴장해야만 했다.
문제는 비가 오고 습도가 높고 또 웅덩이가 많아 말라리아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말라리아균의 종류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렇게 많은 줄은 그곳에 가서 알았다.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풍토병도 조심해야 한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말라리아모기가 발견되면 신문과 방송에서 야단이지만, 이곳은 모든 모기가 말라리아균을 보유하고 있어 그런 것이니 하고 지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자신의 몸은 저항력이 약하지 않게 관리하고 술도 자제한다. 몸이 약한 사람이 술을 마시면 금방 말라리아에 걸려 심한 고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에 부임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우기雨期가 닥쳤다. 현장에서 일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날씨다. 비가 오면 현장은 멈춘다. 심할 때는 비가 3개월 동안 계속 내려 햇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적도 있다. 마치 양동이로 퍼붓는 것 같은 장대비가 몇 시간 계속 내리면 무슨 변이 일어날 것아 버럭 겁이 난다. 헌데 현지인들은 2미터 정도 높이 나무 기둥 위에 집을 지어 놓아 온 동네가 물 바다가 되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이 당시 원목 가격이 폭락하고 심한 우기 탓에 일시적으로 현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한때 한국인 직원 50명 현지직원 300명까지 있었는데, 일 년 만에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서 2명, 현지인 10명으로 최소 인원만 남겨 두었다. 전기가 없으니 자체 발전기를 가동하는 발전공. 선장. 주방장. 목수. 정비공 등 전공 별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고 모두 각자 고향에 돌아간 것이다. 그 많던 직원이 한 달 사이에 다 빠져나가고 나니 마치 유령처럼 현장은 쓸쓸했다.
우선 먹는 것이 문제였다. 한국인이 많고 원목 운반선이 정기적으로 들어올 때는 한국에서 부식과 야채류 등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근처 마을에 가서 먹거리를 구해 오는데 채소가 귀해 주로 고기만 사왔다. 한국에서 배추, 상추 씨앗을 공급받아 집 앞 텃밭에서 농사도 해 봤지만, 비가 자주 내려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금방 시들어 버렸다. 가끔 현지시장에서 채소를 구하게 되면 아까워서 요리하지 않고 약 먹는 기분으로 그냥 날것으로 먹기도 했다.
호수나 하천에 악어 떼가 있고, 타조 사촌격인 ‘에미우‘가 차 옆에서 빠른 속력으로 뛰어간다. 이곳에는 열대 정글임에도 특이하게 원숭이가 없다. 아프리카, 남미대륙, 아시아에도 있는 원숭이가 없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포함해 동물 개체의 이동이 적은 외딴 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라 싶다. 중남미 코스타리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습하고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져 있다. 이 나라도 적도赤道에 있어 파푸아 뉴기니어의 날씨와 풍토뿐만 아니라 정글도 아주 흡사하다고 느끼게 된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원숭이만 빼고 말이다.
파푸아 뉴기니어는 그 당시 300만 명 인구에 400여 개의 다양한 언어를 가진 국가였다. 아마도 세계 최대의 언어 보유국가일 것이다. 그들의 조상은 태어나서 아마도 반경 10~20킬로 밖을 나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말이 안 통하는 외지인이 들어오면 해를 당하거나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인근 마을에 가면 얼굴에 검은 칠하고 머리에 새털로 장식하고 긴 창을 들고 있는 부시맨(Bush Man)을 보기도 한다. 신석기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현대 문명 속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오래전 ‘부시맨’이란 영화가 나왔을 때, 한국에 그 영화에 등장한 실제 부시맨이 여러 명의 통역을 대동하고 나온 적이 있다. 물론 TV였지만 부시맨이 한 말을 그 옆 동네 사람이 통역하고 또 그것을 받아서 전달한다. 계속해서 그다음 사람이 영어로 전달하면 비로소 한국말로 전해주는 그야말로 릴레이식 광경 말이다. 실제 그대로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인근 마을에 사는 현지인들은 회사가 문을 닫자 수입원이 없어진 것이다. 회사의 의류와 가구 등을 보관해 두는 창고는 털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더는 가져갈 물건이 없어 편하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 직원이 앞 동네에서 다이너마이트로 물고기를 잡다가 잘못해 팔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 공사용 석산 발파용으로 우리 현장에만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멀리 떨어진 석산 현장의 다이너마이트 보관 창고로 급히 달려갔다. 출입문은 철문이라 견고하여 이상 없었으나 조그만 구멍의 양옆 환기용 철망이 뜯겨 있었다. 성인은 들어가기가 힘든 크기이고,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이다. 어린아이를 들여보내어 빼낸 것 같았다. 다이너마이트는 거의 다 가져갔고 뇌관과 도화선 줄만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과 중장비를 빼고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약탈당하고 이제 마지막 남은 다이너마이트마저 털린 셈이다. 허탈했다. 현지직원도 동네 사람들과 한 편이라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심복 한 명만 데리고 다시 갔다. 트럭에 다이너마이트를 모두 싣고 바다에 다 버린다고 동네를 돌며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는 내 숙소의 침대 밑과 방에다 숨겼다. 만약 집에 불이라도 나면 큰일 나겠지만, 재가동하면 꼭 필요한 물건이라 마땅하게 숨길 곳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기에 그랬다.
스티브 맥퀸이 나오는 ‘빠삐용’이란 영화가 있다. 외딴 무인도에 종신형 받은 죄수가 탈출하는 이야기다. 절대고도의 아름다운 섬, 그 섬 자체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나는 파푸아 뉴기니어의 생활에서 영화 속의 주인공 입장을 절대 공감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도 홀로 있으면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 영화가 30년 전쯤, 파푸아 뉴기니어 근무할 시기에 개봉되었다. 사우디 근무할 때 큰 아이 낳고 파푸아에 갈 때 둘째가 생겨 두 아들은 2살, 4살이었다. 결혼 초기부터 해외 현장파견 근무라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족과 떨어져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점차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폐쇄는 장기화하였지만, 본사에서는 나를 붙잡아 놓고 오래 있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일없이 먹고 놀면서 봉급을 받으니 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아니었다. 무한정이라는 막연한 시간 속에 할 일 없음은, 나를 질리게 했다. 어릴 때 읽었던 책 ‘로빈슨 쿠르소’가 떠오르고 ‘15소년의 표류기’ 주인공이 내가 아닌가 하는 환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빠삐용이 아닌 빠삐용 같은 생활에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결국, 본사와 싸우다시피 하여 11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김포공항에서 집사람과 마중 나온 둘째 아들을 안아 주려고 하자 울면서 엄마 치마 속으로 숨으며 묻는다.
“엄마. 저 아찌가 누구야?“
젊었던 한때 내 청춘을 불살랐던 낯선 정글에서의 생활, 대자연과 맞서 싸우며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 파푸아 뉴기니어는 이젠 또 다른 고향 같은 곳이다. 함께 고생하며 생활한 현지인들의 모습이 하나씩 떠오른다. 신석기 시대 문화와 현대 문명이 공존하는 곳 파푸아 뉴기니어. 지금 살아있다면 50대 초반이나 중반인 그들, 파푸아인 평균 수명은 50세라 많은 얼굴은 볼 수 없을 것 같아 씁쓸하다.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의료 혜택을 거의 못 받기 때문일 것이리라.
노랑 곱슬머리 검은 피부의 천진난만한 ‘꼼베 마을’ 친구들이 많이 보고 싶다.
원시림에 첫발을 밟은 순간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천지 창조이래 수십만 년 동안 문명인의 발길이 딛지 않은 곳. 맨발로 다니는 현지인들처럼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엄숙하다. 코에 훅 스치는 거름 냄새,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 축축하고 어두운 느낌. 이런 신성한 세계에 문명인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 원시림에 길을 내며 황폐화 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아바타’ 영화에서처럼 자연과 인간과 싸움. 원시인과 문명인과의 싸움.
한번 파괴된 자연은 돌이키는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회복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다. 우리가 후손에게 쾌적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환경파괴는 없어야겠다. 지구 온난화 문제, CO₂ 규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조상은 지금 우리보다 더 배가 고팠어도, 훨씬 행복한 생활을 했을 것이라 싶다. 물질이 풍족하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인가. 그 당시 내가 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오늘 이 영화 ‘아바타’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게 된다.
약력:
배원주(미국명 Peter Bae)
고려대학교 공대 기계공학과 졸업
서울문학 수필등단.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아들이 선택한 길
배원주
주말 아침이라 자전거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숲이 있고 조용한 곳을 찾아 페달을 밟는다. 한참 달리다 보니 멀리 구릉을 두르고 시야 가득 펼쳐진 들판에 긴 수로가 이어져 있다. 냇물이 흘러온 둔덕 너머를 차지한 짙은 푸른 하늘과 초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들판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어디선가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 온다. 아련한 종소리는 내 마음속에 있는 지게를 끄집어낸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지게에 나는 가족을 자랑스럽게 싣고 다녔다. 하지만 긴 작대기로 받쳐 삼각을 이룬 이 지게는 큰아들의 그림자가 있어 아프게 한다.
큰아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래가 보장된 좋은 직장에서 일했다. 그런 든든한 아들이 어느 날,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온 식구는 설득하기에 바빴다. 그동안 어떤 언질이 있었거나 눈치를 전혀 못 채고 있었으니 집안이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15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민 왔다. 이질적 언어문제와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UCLA, MIT공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마디로 전력투구였다. MIT는 분기마다 한두 명씩 학업 스트레스로 목숨을 잃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고 하버드 학생들도 인정하는 학구파들이 모인 곳이다. 나는, 뛰어난 인재들 사이에서 부담감을 느낄까 봐 졸업만 해도 우수하니 부담 갖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들은 인간뇌파를 연구하여 손발 없는 사람에게 로봇 팔과 다리를 부착하는 기술관련 논문을 쓰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생고생하며 공대를 졸업하자마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훌륭한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고, 아들이 하는 프로젝트가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인데 말이다. 그러다 결혼하여 자식 낳고 알콩달콩 살면서 평신도로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이지 꼭 신부가 되어 사제의 길을 가야만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왕 신부가 되려고 했으면 처음부터 신학교에 입학하지 뭐 하러 MIT에서 그 고생을 했나 말이다. 아내도 결혼도 시켜보지 못한 아들이 아깝다는 생각에 억울하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못난 녀석같이.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시작했다. “네 뜻을 잘 알겠다. 하지만 10년 후 아니, 평생 후회하지 않을 길인지 신중하게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들은 나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 제가 지금 신학교에 가서 사제성소가 있는지 확인 못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평신도로 사는 것도 생각해봤어요. 저에게는 사랑이 커서 한 사람 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요. 제 인생인데 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해 봤고, 장남이기에 더 신중했어요. 결코, 순간적으로 결정한 건 아니에요.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아들은 가정 꾸미고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사는 것도 좋겠지만, 궁극적인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아들이 느끼는 이 큰 행복을 많은 사람에게도 알려주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 앞에의 인간은 미미한 존재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인간의 삶이 이렇게 숭고할 수 있구나!’ 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가 경제적인 문제로 어렵게 의대를 졸업하고도 신학교에 간다고 할 때 그분의 어머니는 “너의 형이 사제의 길을 걷고 있으니 그냥 의사가 되라!”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신부가 되어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사십 대 나이에 돌아가셨다. 주님은 자기 아들을 그렇게 쓰시고 왜 그토록 빨리 데려가야만 하였는지. 본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행복하게 천국 갔을지 몰라도 남아 있는 가족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한때 성당을 멀리했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이 머리에 떠나지 않을 때였다. 아는 분의 외아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분에게 “참 대단하십니다. 자제분을 어떻게 키우셨기에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이가 그런 길을 택하였는지, 아무나 할 수 없는 선택인데.”라고 덕담까지 했다. 그랬던 내가, 막상 내 아들이 그 길을 간다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분했다. 내 아들은 이태석 신부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 싶었다. 이런 와중에 아들 문제로 집안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아는 어느 신학생 부모를 만났다. “자녀가 택한 길이 처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이젠 적응이 되어 그분에게 맡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가 열심히 기도하고 밀어주어야지, 갈등하면 되느냐.”고 야단치듯이 말한다. 버럭 화내며 볼멘소리를 뇌까리고 싶었다. ‘남의 일이고 자신이 당면한 일이 아니니 편하게 말할 수 있겠지요!’라고 말이다.
우리 가족의 설득과 우려에도 아들은 기어코 신학교에 들어갔다. 현재 6년제 보스턴 신학교 4년 과정에 잘 적응하며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혹시나 했던 아들에 대한 기대는 외로움으로 변한다. 아들과 전화하고 나면 며칠이고 깨어날 수 없는 슬픔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그러한 나의 맹목적 기대는 아들을 위한다는 번제(燔祭)이고 내 생명의 일부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나는 아들의 바람에도, 나의 신앙이 미천하여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가끔 성당에 신발 자국만 남기고 온다. 회사의 일이나 다른 일로 마음이 불편하고 세상 걱정거리가 많아진다. 그럴 때는 온갖 부와 명예를 가질 기회와 젊음의 혜택을 포기한 아들이 선택한 길이 가끔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탄다. 어느새 긴 작대기로 받쳐 삼감을 이룬 지게에 큰아들의 웃음소리가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술 마시고 노래하던 십팔번,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그리운 내 님이여!’ 노랫가락도 바람결에 실려 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자전거 페달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