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남중대 수필가 |
---|
주평 선생님과 만남 그리고 이별
남중대
“중대야. 내가 90살까지는 활동할 수 있겠제?” 선생님은 나와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나에게 묻고 확인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멈출 줄 모르는 연극과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1990년, 내가 이곳 산호세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기 위해 이민보따리를 풀면서, 주평 선생님과 숙명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한국아동극의 개척자로, 수많은 아동극본을 발표하고 그 극본으로 한국 최초로 아역배우를 연극무대로, 영화스크린으로 배출해낸 아동극작가로서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분이, 연극무대가 아닌 작은 구멍가게의 계산대에 서서 독특하며 흉내를 낼 수 없는 그 진한 경남 통영 사투리 “중대야~!”로 나와 미국에서 첫 만남의 막이 올랐던 것이다.
1993년 어느 날, “중대야. 우리 아동극 한 번 해보자!”
이렇게 시작된 말은, 미국 최초로 아동극단 민들레 홀씨가 지역신문에 뿌려지면서 그 유명했던 아동극 ‘콩쥐 밭쥐’가 50여 명의 단원과 40여 명의 학부모가 미국을 시작으로 하와이, 한국(3회), 일본(2회)을 오가면서 막을 올렸다. 그런데 이때 어디를 가나오나 시도때도없이 “중대야~.”하고 불러주시던 선생님의 사랑 속에, 언제부터인가 나는 주평 선생의 오른팔로 불리면서 광대놀음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는 세계적인 경제불황으로 3만 불의 제작비는 채워지질 않았다. 끝내 연극무대의 막은 다시 올라라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부모님의 모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2세들에게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체험케 하는 교육의 무대를 중단해야만 했던 아픔과 고향산천을 떠나와 이민의 삶을 사는 이민 1세들에게 향수를 달래주는 울고 웃는 신 나는 잔치 한마당을 펼쳐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선생님은 얼마나 답답해하셨는지 모른다.
자존심이 일등이요, 고지식한 성품은 대쪽 같은 선생님은 그 열정을 쏟아내지 못함인가, 점점 약해져 가시는 듯했다. “선생님. 글이나 재미있게 쓰시지요.” 나는 늘 이런 말로 위로해 드리면서 신문지면으로 발표될 수필 원고를 교정하고 정리한 뒤 연극대본을 외우듯 감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낭독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는 “됐다.”를 자신 있게 외치시던 모습은 ‘콩쥐 팥쥐’에 등장하는 꼬마군졸의 연기, 바로 그 장면이기도 했다.
언제인가 나를 친동생처럼, 오랜 친구 같다면서 목이 쉰 소리로 자신의 지난 세월 앞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이슬 같은 눈물을 찍어 내리면서 회고하시던 선생님의 85년 인생드라마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난해 6월, 수필 제5집 《추억의 강에 띄우는 쪽배》의 출간과 대표작 《숲 속의 대장간》이 19년 만에 다시 초등학교 4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이를 본 선생님은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갖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나도 커다란 보람이었다.
이제 선생님은 “중대야~”를 부를 수도, 책상머리에 같이 앉을 수도 없는 영원한 이별을 길로 떠나가시고 말았다. 그러나 긴 세월을 함께 했던 수많은 흔적은 추억과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높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쟁쟁한 목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예. 선생님 알겠습니다.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2015년 2월 19일(목), 미주주간현대(제9년 7호)
약력:
경북 포항 출생
한맥문학 수필등단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아동극단 민들레 총감독 역임
실리콘밸리 한인회장 역임
웹관리자
- 추천
- 1
- 비추천
- 0
해맞이
2016년 병신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부모·형제는 물론, 이웃과 친지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담은 마음을 주고받는 인사다. 예쁜 연하장(카드)에다 정성으로 복을 빌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면서 이런 사랑의 정을 나누는 방법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인터넷으로 스마트폰으로 아주 쉽게 새해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지 모른다. 세상 참 좋아졌다고들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네 이민생활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 떠나온 고향에서 벌어진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동해로 이어가는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았다는 것이다. 검푸른 바닷물을 헤치고 붉게 떠오르는 새해 새 아침의 밝은 해를 맞이하기 위해 몰려가는 발길들 때문이다. 멀리는 서울에서부터 내륙 각처에서 밤을 새워 달려간다. 호랑이 꼬리로 잘 알려진 곳, 바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28번지의 ‘호미곶 해맞이 광장’이다.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는 곳이다. 관광명소로 알려지면서 새해 첫날, 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소망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변함없이 떠오르는 아침 해다. 그러나 새해 새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16세기 조선조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로 잘 알려진 남사고가 저술한 ‘산수비경’에서, 이곳을 풍광이 매우 좋다고 역설 한 곳이다.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연해주를 앞발로 할퀴는 형상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가 되고, 호미곶은 꼬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 새해의 소망을 간절히 기원하게 되면, 꼭 이루어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어떤 소망을 비는 것일까? 아마도 그 첫째는 건강을 기원할 것이다. 건강을 잃는다면 천하를 준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모님 아내 남편 자녀의 건강을 간절히 기원했을 것이다. 그 두 번째 소망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는 우스운 말이 있다. 사업의 번창과 좋은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기를 기원할 것이다. 풍족하고 안정된 재정으로 가계부가 살찔 때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 세 번째의 소망은 나라를 위해 기원했을 것이다. 위정자들의 올바른 민주정치가 이루어질 때, 복지국가로 선진대국의 반열에 당당히 설 수가 있을 것이다.
호미곶 해맞이광장에는 1999년 6월에 새천년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기를 기원하며 세워둔 ‘상생의 손’이라고 이름 붙여진 조형물이 서 있다. 높이 18.5미터, 무게 18톤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손바닥을 펼친 멋진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동해의 아침 해를 맞이한다. 육지에는 왼손, 바다에는 오른손으로, 서로 돕고 살자는 깊은 뜻의 화해와 상쇄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 한다. 소통과 화합, 안정과 번영의 힘으로, 꿈에도 소원인 평화통일의 밝은 날도 밝혀 줄 것이다. 이 모두가 7천만 우리 민족이 바라는 새해 새 소망일 것이다.
고향산천을 떠나 이국만리에서 이민의 삶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새로운 삶의 텃밭을 내어줌에 감사하며, 모든 면에서 안정되고, 복된 새해가 되기를 소망할 것이다. ‘지난해의 묵은 찌꺼기 다 떨쳐버리고, 새해에는 건강하고 희망이 가득하게 하소서, 자신에게 정직, 친구와는 우정, 가정에는 화목, 사회에는 신뢰, 나라에는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새해의 기도 ‘시인 이제민) 새 소망의 새해 달력을 책상 앞 벽에 걸면서, 2016년도 만사가 무탈하기를 기도 한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남중대
요즘 한국에서 어느 유명 가수가 부른 노래 중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중년층에게 큰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번 따라 불러본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어떤이가 이 노랫말을 오선지에다 콩나물을 갖다 붙였는지는 모른다. 모두가 부르기 좋은 노래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흥얼거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IT시대의 산물로 100세 시대의 청신호가 켜진 지금, 인생 60은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이 남아있는 듯도 하지만, 나는 막차를 타고 가는 노신사가 되어 있다. 이에 걸맞은 사건이 하나 있다. 2011년 9월 1일이다. 나에게 신인수필가라는 또 하나의 명패가 붙은 날이다. 이날은 숨길 수 없으며 얼굴 붉어지는 쑥스러운 날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을 만들어준 두 분의 후견인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 연극공연과 수필낭독을 함께했던 85년 인생드라마의 막을 내린 아동극작가이며 수필가였던 주평 선생님의 특별한 훈육이 있었다. 그리고 힘겹고 어렵기만 한 낯선 이민생활 속에서 잊히고 있었던 허홍구 시인이다. 서울 광화문 뒷골목 어느 작은 목로주점 구석진 테이블에 쪼그리고 앉아, 지나간 세월과 남은 세월을 막걸릿잔에 철철 넘치게 부어 주고받던 일이다. 나는 어설프지만, 글짓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떨리는 내 속마음을 한 문단에다 조심스럽게 열어 놓았다. 이후 당선소감 속에 나의 사진과 약력까지 덤으로 내놓게 된 것이다.
사람은 어머니의 산고를 알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뭘 알기나 한 것처럼, 두 팔다리를 바동거리며 첫 울음을 시작으로 세상살이 인생무대의 막을 올리게 된다. 이처럼 성장하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길이 달라질 것이다. 잘난이는 일찍, 못난이는 늦게 승리하여 행복을 누린다. 그런가 하면 평생 어두운 자갈길 안에서 헤매다가 세상일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나는, 내 갈 길을 내 걸음으로 왔고 또 가고 있지만 참으로 복이 많은 것 같다.
내 작은 마음 판에 어제와 내일을 그리다 말고 멈춰 서 있는 나에게, 새로운 시작의 유혹이 따사로운 남풍이 되어 불어왔다. 60년 세월을 한참 넘긴 나를 늦게나마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복을 주시니 그저 고맙고 감사 할 뿐이다. 그렇다. 시작이 늦다고 생각지 않는다. 바르고 정직하게 언행일치의 삶을 한 편을 글로 그릴 것이다. 마지막 종착역이 가까이에 있을지라도 나는, 내 스타일대로 천천히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긴 겨울을 참고 견딘 인내가 있었기에 달콤한 봄비를 먹으면서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가을을 기다리며 향기를 담은 꽃을 피워내기에 탐스럽고 보기 좋은 알이 꽉 찬 열매를 맺어 사랑을 받고 기쁨의 결실을 힘껏 안아볼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마음 깊숙한 곳에 담고 경주할 것이다. 차오르는 답답한 숨을 몰아쉬면서 아직도 내 작은 주름진 육신에 남아있는 열정을 쏟아 내기 위해 헉헉대며 걸어갈 것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가요의 내용처럼 용기와 자신감으로 앞서 가는 그들을 땀을 내며 쫓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