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명계웅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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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 뒤집어 보기
명계웅
예전 국어고문시간에 우리가 배웠던 삼국유사에 전해진 신라 향가 ‘처용가’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A.D 879년경 신라 헌강왕의 눈에 들어 급간이라는 벼슬과 미모의 아내도 얻어 정사도 돌보며,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딜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가 보니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엇고 둘은 뉘해인고? 본대 내해다마는 앗아날(빼았겼으니) 어찌하릿고!” 그러면서 처용은 불륜현장을 덮치지를 아니하고, 그냥 밖으로 나와 달밤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아내를 범한 외간 남자는 처용의 미모에 반한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이었다. 조용히 물러난 처용의 형상(얼굴)을 문에 붙여놓으면 역병을 옮기지 않겠다고 전해지면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쫓아내는 축사(exorcise)의 궁중 가면무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오방색의 무용수와 춤사위가 현란하고 활기차게 발전 전승이 되어 결국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삼국유사 처용설화는, 신라 헌강왕이 지금의 울산 지역인 개운포에 신하들을 데리고 놀러 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고 날씨가 험악하게 돌변하여 어둡고 당황하던 중에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고, 그 중 똘똘하게 보이는 처용이 헌강왕의 눈에 들어 벼슬자리를 얻게 됐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실은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비단길 육로와 해상으로 서역과의 교역이 빈번 활발했던 만큼 처용과 용왕의 아들들이란, 아마도 난파당해 구조된 가무잡잡한 이방인 몰골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아내의 불륜 현장을 보고서도 조용히 밖으로 나와 달밤에 어찌할 거냐고 자조적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는 처용의 행위를, 나의 학부시절 양주동 박사는 “관용적인 대범한 신라정신”이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의 처용가에 대한 풀이는 이렇다. 처용이 자기 침실잠자리에 보았다는 4개의 사람 다리는 실은 자기 아내와 자신의 다리이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를 초극(이탈)하여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실존을 감지, 인식했을 때 발현되는 존재의 쾌감과 달밤에 춤을 췄다는 처용의 행위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예로부터 가무(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우리 조상의 초월적 문화예술의 예지가 새삼 놀랍게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지구촌 문화풍토에 한류가 휩쓸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또한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5월 20일(수) 시카고한국일보, 6070 문화산책
약력:
1969년: <현대문학> 평론 추천 완료
Northeastern일리노이 주립대학
한국어,한국문학 담당교수 역임
시카고문인회 창립멤버, 초대 회장
미중서부한국학교협의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