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nomad의 일탈과 창조적 상상
-강정실의 <렌즈를 통해 본 디지털 노마드 > 작품세계, 사진기행수필의 묘체
한상렬|문학평론가
수필문학은 미래문학의 첨병(尖兵)이라고 말한다. 수필이 미래문학을 선도한다는 아나톨・프랑스의 언명을 예언처럼 신봉한다. 양적팽창이 이를 수긍하게 한다. 쏟아지는 수필집, 문단 행사장에는 어디고 수필가들이 넘쳐난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문예지 경영이 그리 녹록치 않음에도 한국 문단은 지금 불꽃축제를 한다.
분명 축복이지 싶다. 하지만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주변문학이니, 신변이니, 일상이니… 그런 언술이 아니어도 외적 성장 뒤에 숨은 그림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고통의 체험을 수반해야 할 수필은 지금 너무 안이하고 자족自足에 넘친다. 개중에는 자기도취와 만족에 기꺼워할 이도 있게 마련이겠지만, 호사가들은 이를 놓치지 아니한다. 시대가 변하건만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변화에 제일로 민감하지 못한 이들이 작가라고도 한다. 이는 비판인가, 아니면 고언苦言인가.
강정실의 수필을 감상하노라면 이런 비판과는 거리를 두고,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게 한다. 이 어려운 시대에 어찌 살아야 하는지 그의 수필은 우리들에게 귓속말처럼 속삭인다. 아니 멀리서 온 반가운 이의 편지글처럼 삭막해진 우리들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그래 삶의 두려움도, 절망까지 잠시 부려놓고 희망이라는 이름에 익숙하게 한다. 문학이란 철학의 명제처럼 논리적인 언어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순적이며 비약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들 파괴된 내면을 조심스럽게 기우고 피 흘리는 상처를 닦아내지 않던가.
수필작가, 강정실의 기행수필집을 펼치면 그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시선의 남다른 포즈에 주목하게 한다. 한국의 항도港都 부산에서 태어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의 평소의 동선動線은 [사진작가+수필작가]에 [문학평론가]라는 2중, 3중의 통섭通攝을 통해 다양한 세계의 진실규명과 문화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경향성은 일종의 노마드nomad 적인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적 인식이 ‘인식론적 단절’ 위에서 시작한다는 바슐라르의 지적은 혜안이다. 과학뿐이 아니다. 철학과 예술도 이런 단절 위에서 수립된다. 그러나 참된 인식은 인식론적 회귀에서만 완성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담론이나 수학적인 함수, 예술적 재현 등 모든 형태의 글[文]은 이런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문맥으로, 글의 시공간적 지표로 회귀했을 때, 그 완전한 의미를 찾게 된다.
글이 그 안에서 생겨나고 또 그 안으로 돌아가는 장場, 시공간적 계열로 짜인 맥脈이 바로 문맥이 된다. 이 점에서 보면 문맥은 곧 현실이 된다. 철학은 현실에서 출발하여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유思惟를 시작할 때, 사유보다 사람이 먼저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여 사유에 앞서 현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드러남’은 빛을 통해서 우리와 세계를 하나로 묶어 준다. 이 드러남의 장이 현실을 구성하게 된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먼저, 작가 강정실은 왜 여행을 떠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수필에서 잘 나타나 있다.
①여행은 생각하지 못했던 옛 기억이 한 모서리에서부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마력이 있다. 이 마력은 순간적 생명으로 부활하는 듯하지만, 이내 가슴은 수박빛 향기가 아련히 풍기며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는 마음 깊은 곳까지 흔들어 저리게 하는 속성이 있다.
-<쾰른성당Der Kölner Dom을 보며>에서
②이렇듯 여행은 잃어버린 어제와 각박한 오늘의 삶을 일깨워 주는 자잘한 아픔이 되는듯하다. 하지만 여행이란 잊혔던 과거를 되찾을 수 있고, 또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게 하는 속성을 지녀 좋다. 만약 잊혔던 장소에서 생각지 못한 편린片鱗 하나라도 건지게 되면, 그 반가움과 기쁨은 배가하리라.
-<독일 옛 수도, 본bonn을 찾아서>에서
①에서 보듯 여행을 통한 자기 발견의 기쁨 그리고 ②에서와 같이 삶의 자각, 이는 바로 화자가 여행을 떠나는 남다른 이유겠지만, 통상적 기의로 보면 누구나에게 있는 공통된 진술이겠다. 하지만 이런 여행이 사진작가이자 수필작가인 강정실에 이르면 전혀 다른 얼굴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작가에게 있어 여행은 존재 각성의 행위가 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하지 않는가. 언어로 짓는 존재의 집, 그래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나’를 그렸다. 강정실의 기행수필은 이런 인간에 대한 해명에 기초하고 있지 싶다. 그렇기에 그의 여행은 바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 된다. <독일, 발데네이 호숫가에서>는 그의 기행수필의 백미白眉이다. “대형 인공호수, 루드강江을 댐으로 막아 만든 발데네이제Baldeneysee다. 35여 년 전 가끔 찾았던 이곳을 세월 탓인지, 다른 나라에서 산 탓인지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 에센하면 기억에서라도 툭 튀어나왔어야지, 어떻게 이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싶었다.” 기억의 앨범 속에 잠들어 있는 사유와 상상을 깨우는 모티브. 발데네이 호숫가에서 그는 오래된 추억에 잠긴다. 바로 화자인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하늘 위에는 별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별빛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아니, 목엔 밧줄이 없더라도 눈앞의 운명을 생각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주인을 따라가는 염소의 운명, 이를 바라보는 윤오영 선생의 운명은 바깥세상으로는 나갈 수 없는 고통의 빛이라 싶다.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다가 다시 불빛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추억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아픔의 불빛이며, 저 불빛은 생명의 불빛이다. 하늘의 별과 건넛마을의 불빛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긴 한숨을 켜켜이 짓는다.
-<독일, 발데네이 호숫가에서> 부분
“서른 살 적, 이곳에 젖어들었던 그 침묵의 시간 속으로 나는 걸음을 옮겨놓고 있다.”고 했다. “별빛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게 아닌가 싶다.”는 자기 고백적 서술은 존재에 대한 자아성찰이자 자기 관조일 것이다. 발데네이 호수의 미적 풍광과 어우러진 사유의 시각화가 이 수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정서와 사상의 어울림이요, 시각적 언어의 묘체이다. 깨달음은 이런 순간에 오기 마련이다.
사방은 고요하다. 호수 건너에의 불빛은 물결 위에 길게 누워있다. 나는, 다시 내가 사는 도시 속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른다. 긴 밤을 지새우고 묘지 위에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한낮의 더위는 아침이슬에는 시련이라 했다. 설움 속에서 알알이 빛나는 아침이슬과 미소, 인생은 풀잎에 잠깐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 같은 존재라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것을 영롱하게 볼 수 있는 내면의 세계가 있어 좋다. 서러움을 모두 버림으로써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독일, 발데네이 호숫가에서> 부분
강정실의 기행수필이 돋보이는 까닭은 이렇게 사색과 사유의 산물이라는 데에 있다. 화자의 시선에 정박한 현실문제에 대하여 내적감각과 충일한 자기화가 이 수필에서 빛이 나고 있다. 그저 기행이 아니요, 삶과 존재라는 기의 안에 드러낸 기표들이 이 수필에서 이른 아침 이슬처럼 영롱하다. 글쓰기의 즐거움이자, 글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아마도 강정실이 기행수필을 즐겨 창작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성싶다. 다시 다음 작품을 보자.
①나 스스로 ‘삶이란 무엇인가, 원래 삶이란 이런 것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불현듯 이 땅에 살아가는 나 자신의 삶이 구차하고 모순투성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밤하늘의 별 보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생겼다. 별은 세상의 온갖 번뇌를 말없이 감싸주고 남에게 띄지도 않아, 위안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싶다.
-<포코너즈와 인디언의 슬픔>에서
②다시 창 밖에서는 흰 눈이 내린다. 고요히 깊어만 가는 밤이다. 칠흑 같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지난날 정신적 병마에 신음할 때, 허둥대고 밖으로 나돌기만 했던 것이 참회의 눈물로 되새겨진다. 유독 이 밤은 외로움과 괴로움에 지치도록 흰 눈이 내리고 쌓인다. 벌거벗은 내 자아의 모습이 영안靈眼으로 보이는 듯하다.
-<외일즈(Wales)에서의 오로라>에서
작가 강정실에게 있어 기행은 중요한 삶의 향방이다. 사진을 찍고 그 기록을 문장화한다. 화자의 시선은 너른 세계도 좁게만 보인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이를 일탈이라 한다면 화자에게 있어 그 일탈은 영감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리는 어부와도 흡사하다. 그리하여 생활에서의 일탈은 그에게 있어 발견의 기쁨을 향유하게 하는 공간이자 시간이 된다.
화자의 기행은 그 중심의 사진작가로서의 예민한 관찰과 삶의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사진작가로서의 화자의 행위는 촬영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열려 있다. 수필 <독종가시와 조슈아트리>는 조슈트리 국립공원에서 그가 만난 조슈아트리와 촐라 칵투스Cholla Cactus라는 선인장군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창작의 동기는 기행수필이지만, 이 수필은 그런 괘와 달리하고 있다. “광각렌즈로 바꿔 꽃 가까이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넓적다리가 따끔거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바지에 칵투스 덩이 하나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칵투스 덤불을 건드린 것이다. 생각 없이 손으로 밤송이를 털 듯 손으로 떼려 했다.”고 한다. 이런 표피적 진술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은 않다. 화자는 여기서 인문학적 상상을 퓨전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찾기에 성공하고 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가시덩이군群 사이에 보이는 식물의 꽃술은 해마海馬 혹은 독사 머리 같다. 아니다. 자세히 다시 쳐다보니 섬뜩한 것이 흡반충 내지는 바닷가의 말미잘처럼 찰거머리 입처럼 보였다. 다행히 독은 없어 이상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또 다른 곳에도 번식하려는 식물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만나면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거머리 같은 습성. 그 강렬한 생명의지가 느껴지는, 식물의 정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싶었다. 건조하고 척박한 이런 곳에서 살아가야하기에, 또 다른 번식본능은 온갖 만물에 다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이때만큼은 온갖 욕념이나 번민과 고통이 사라져버린 선승禪僧의 마음이 되어 적멸궁으로 떠난 듯싶었다.
-<독종가시와 조슈아트리>에서
대상에 대한 화자의 상상은 식물의 속성이나 외면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한 현상에 인문학적 상상을 교직하여 대상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창작 의도를 드러낸다. 이런 발상은 일반적인 기행수필에서 찾을 수 없는 낯선 공법이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통합 이른바 통섭이다. 화자는 이를 ‘절묘한 조화’로 보고 있다. 이런 발상과 해석이 이 수필의 핵을 이루며 주제의식을 밀도 있게 하고 있다. 화자는 그저 대상을 관조하지 않는다. 일상적이고 자연한 현상을 통해서도 그의 작가 정신은 존재규명이라는 철학에 닿아 있다.
“그렇다. 묘妙 라는 낱말 속에는 새로운 삶과 기쁨이 소생하고 희망의 의미가 내포되어 의를 이루는 것이리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마음과 뜻 그리고 정성으로 내일이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깊은 밤은 여느 때보다 조용하고 경건하다.”라는 화자의 자각이 확연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경향성은 수필 <와일즈(Wales)에서의 오로라>에서도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다시 창 밖에서는 흰 눈이 내린다. 고요히 깊어만 가는 밤이다. 칠흑 같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지난날 정신적 병마에 신음할 때, 허둥대고 밖으로 나돌기만 했던 것이 참회의 눈물로 되새겨진다. 유독 이 밤은 외로움과 괴로움에 지치도록 흰 눈이 내리고 쌓인다. 벌거벗은 내 자아의 모습이 영안靈眼으로 보이는 듯하다.” 이런 내적감각과 혜안이 이 수필의 문학화에 기여하고 있다.
강정실의 기행은 사유가 넘친다. 이런 사유를 전개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실마리다. 실마리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사유의 전개는 달라진다. 이런 사유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한다. 문학이 상상의 세계라지만 수필의 경우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를 그린다면 애초 수필이 요구하는 존재 파악과 멀어지게 된다. 때문에 수필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 여기 현실은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인 방식으로 주어지게 된다. 우리는 드러남 저편에 숨어 있는 실재를 탐구하지만, 모든 탐구는 궁극적으로 드러남 자체에서 그 근거를 구할 수밖에 없다.
사진작가이자 수필작가인 강정실이 새롭게 선보이는 기행수필집 <렌즈를 통해 본 디지털 노마드 >은 언어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표현상의 변화만이 아니다. 그의 미학적 언어는 내용상의 낯섦을 보여준다. 이는 창조적 직관의 통찰이다. 이 점이 강정실의 기행수필이 갖는 묘미일 것이다. 그 키워드는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이런 경향성은 일종의 노마드nomad 적인 세계의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현상을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시도하고 있음을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어쩌면 노마드와 흡사하다. 하지만 그는 유목민이요, 방랑자가 꿈이 아니다. ‘디지털 노마드’이다. 그래 그의 기행은 고향에 대한 향수인 토포필리아에 근접하고 있으며, 그 ‘떠남’이 ‘창조적 상상’에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기행수필은 기행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해석과 의미화를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작품의 행간에서 쉽게 감지하게 한다. 한 마디로 그는 시대에 앞서가는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장르의 결합과 통섭을 통해 그는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이기에 그의 기행의 공간은 문학적 상상을 유발하게 하는 모티브이자, 디지털 시대를 사는 작가의 노마드적인 체험의 공간일 것이다. 이런 일탈의 현장은 고향에 대한 해바라기인 토포필리아를 근간으로 하여, 사유의 세계인 존재파악과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정서의 사상화로 구체화되고 있다. 한 마디로 그의 기행수필은 디지털 노마드의 일탈과 창조적 상상이라 하겠다.
이렇게 수필문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있어서 다른 예술이나 타 장르의 문학과 달리 인간의 삶을 다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조명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의 수필이 읽히는 마력과도 같은 힘을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진기행수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그의 저작著作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약력:
에세이문학 수필천료
에세이포레 문학평론
현재: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한상렬 문학평론가님!! 강정실 회장님의 평론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강정실 회장님의 기행문은 제가 매월 책을 받으면 제일 먼저 읽는 글이 회장님의 기행문 입니다.
그 글들을 읽을적마다 그곳의 역사를 쓰시는 것처럼 알뜰하게도 사진속의 그곳을 설명을
다 해주셔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 읽으면서 여러번 감탄을 하며 읽곤 합니다. 잘 읽고 나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