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의 부활과 변조
- 문장으로 축조해 내는 달의 궁전
한분순 (시인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청춘의 서정은 ‘백석을 읽는 새벽’, 그런 영역에 놓여 있다. 젊음은 그 어느 시절보다도 총명하되 너무도 애틋하다. 삶을 마주 해야
하는 아침은 지나치게 결사적이며 밤은 그나마 반란적이다. 새벽은 모두를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현재의 감성이다. 사회적 자아로
확대하면 싱그러워야 할 세대가 저주는 독백이며 혁명은 없다는, 그래서 비굴하게 버티겠다는 슬픈 견딤의 시대이기도 하다. 백석의 모던한 부활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훤의 시집은 이러한 까닭에서 세차게 닿는다. 마야코프스키처럼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의
절절한 내면을 지닌 이 시대의 청춘에게 이훤의 작품은 직관적으로 또는 애수적으로 또한 역동적으로, 묘한 완전체로써 젊음을
위로한다.
육체를 여럿 묻은 페이지가 녹물에 사장된다
우리는 같은 기억을
자꾸 다르게 말하기도 하고
(말을 감추지 못한 어떤 이는 현대식 포탄에 의식을 놓쳤다)
잠시 묵음
반듯하게 다시 적힌
수업이 시작된다
- ‘자, 다음 장’ 전문
이훤에게 안내할 첫 작품은 ‘자, 다음 장’이다. 문학에서 시인의 맡은 바가 변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명랑한
육체가 복잡한 영혼을 계몽하는 현대이다. 사람들은 문학에게 가르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며 다독여 주기를 기대한다.
예전의 시인들처럼 엘리트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이훤은 뚜렷한 성취에 도달했다.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우쭐하는 지성인이 아닌 함께 걷는 다정한 시인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같이 삶의 길을 찾는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것이다. 수려하되 겸손하게 공감대를 확보하는 시인의 태도는 현대인이 소망하는 문학의 새로운 소명이다.
별들이 음계처럼 떠 있다
연주가
밤을 앗아간다
- ‘어떤 음악은 소리 없이 연주되고’ 전문
음악은 신이 보낸 선물이라고 한다. 취향의 고급과 통속을 떠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가장 압도적 장르이다. 노래방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듯하다. 시는 내적 노래이다. 음표가 없지만 눈으로 읽으며 마음속에는 음률이 흐른다. 이러한
시의 속성상 음악에 대해 다루는 것은 감정 이입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발상의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의미가 있다.
보통 어둠이 밝음을 덮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는 그 반대로 빛이 밤을 이긴다. 삼행 짧은 시이지만 내포된 세계는
우주적이다. 별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이 시는 아득한 별자리의 사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거대한 이야기를 압축
시키고 있는 듯한 서정의 저력이 배어있다.
A급 햇살이 내리쬡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B급 바람을 주워 담으면서
C급 걸음으로
B급 시인은 퇴근합니다
열띠게 속아집니다
외모가
상냥함이
집과
차가
인품이
활자가
감성이
은유가 분류됐습니다
표정으로 분주히 등급이 매겨집니다
발 없는 말은
늘 사람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학교에
일터에
수저에
취미에
벗에
시에
음악에
애인에
생(生) 곳곳에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습니다
분주하지 않은 채점표를 들고 신(神)은 아직 관조합니다
-‘어느 계급주의 사회의 화창한 하루’ 전문
계급이라는 낱말은 이념과 함께 과거의 편린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이다. 모두들 겉으로는 평등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매스미디어에서, 광고나 연속극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은 신인류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시절보다
계급적임을 젊은이들은 체감하고 있다. 이제는 감정마저 계급적이다. 스펙 쌓기와 기성세대의 오만 사이에서 청춘은 슬퍼할 겨를도
사랑할 틈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 내야 한다.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 하지만 감정마저 상류계급의 전유물이 된 현실에서 청춘은
무신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듯 저린 심경을 지나친 웅변이 아닌 담담한 토로의 힘으로 훨씬 간절하게 전개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대는 천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투쟁하는 전사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선량하기엔 너무 차가워진 시대이고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나약해진 개인, 이것이 현재진행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오가며 다들 느끼는 비애를 지나치지 않은
어조로 다루는 것은 그 동감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산타와 사탄은 ㄴ, 한 끗 차이이다. 선악의 경계는 현대에서 쉽게 무너진다.
그 슬픈 순리를 시인의 혜안으로 날렵하게 묘사한 솜씨가 주목할 만하다.
오늘따라 유독 허기가 졌다
황홀을 먹고 싶었다
낭만 실조에 걸린 것 같았다
날 보고, 네가 웃었다
포만감에
숨 쉬지 못했다
- ‘낭만 실조’ 전문
‘낭만 실조’는 요즘 젊은 세대가 동경하는 백석의 시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사랑이 사치품이 되어버린 청춘에게 연애 감정은 환각과
구원 사이에 놓인다. 연애를 할 겨를이 없는 시대에 사랑을 다룬 시가 그 공허를 채워주는 것이다. 낭만에 대하여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유행가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의 사회적 애정 결핍을 뜻한다. 지금의 청춘이 느끼기에는 가장 강렬한 감성인 사랑마저
경쟁사회의 가속도 속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연애 시에 대한 갈망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로부터의 망명지가 되기에, 실제의 연애가 아닌 인쇄된 활자의 연애 감정에서 위안을 받기에 그러하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결국은 사랑이라고,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얘기하듯 조숙해진 젊은이들은 이미 그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화두에 빠져 겉멋 든 필력이 아닌
이 시대가 찾는 감정의 결을 이훤이 매끈하게 가다듬어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서정을 공급한다.
매번, 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셨다
등으로 우는 법을 배운다
- ‘출국’ 전문
더 깊은 혜안은 ‘출국’에 나타난다. 달의 뒷모습을 궁금해 하거나 해의 이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밝음이 밝은
것은 그 뒤에 어둠을 숨기고 있기에 그 대비로 오히려 환해질 수 있는 것이다. 눈앞의 찬란함이 아닌 그 뒤의 애잔함을 감지하는 것이 시인의 미학이다. ‘등’으로 우는 법은 그러한 짙은 생각을 녹여 내고 있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라면 등에 대하여 관찰한다는 것은 관조의 힘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동시대의 정서와 부합하는
어조이기도 하다. 예전의 시인들이 통곡과 넋두리를 근원으로 삼았다면 이훤은 그 과잉된 감정을 건조하게, 그래서 훨씬 저릿하게
표현하는 요즘의 흐름을 이끈다. 모두가 지쳐 있고 무엇이든 잠깐의 즐거움이라도 주는 서커스 같은 것을 바라는 시대이다. 나는
슬퍼도 되지만 남의 슬픔에는 너그럽지 않은 현대가 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슬픈 광대처럼 눈물의 촉촉한 심정은 지니되 흘러
내리지는 않게, 표현하는 솜씨는 현대시의 새로운 개척지이다.
가끔, 가습기 대신 구름을 틀고 싶어요
물은?
괜찮아요
내 안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건조할 일은 없겠구나
흥건한데
무지 척박해요
(그는 오랫동안 나를 안고 있다 하늘로 닦아줬다)
꼭지를 열 때마다 평온이 쏟아졌다
-‘건조한 우물’ 전문
‘앙팡 테리블’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시대는 언제나 무서운 악동을, 돋보이는 반항을 기대하기에 그렇다. 다만, 정작
현실은 젊은이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그들이 아나키스트로 보이는 것은 무정부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나 이외의 세상을
살펴 볼 여력이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판도에서 슬픔은 가장 적극 소비되는 감정 아이템이다. ‘건조한 우물’이라는 작품은
내면에 고여 있는 우울을 고백하여 선뜻 울지도 못하는 현대인의 심경을 다독인다. 시의 영역에서 일상에 닿아 있는, 은유가 아닌
생활의 사물을 착안점으로 하여 대화체라는 현실의 화법으로 전개시키는 산문의 힘은 신선하게 매료되는 복합성이다.
잠에서 깨고 나면
한 시절이 엎질러져 있기도 했다
잠든 적 없는 사람처럼 나는 다시 엎드렸다
-‘몽상’ 전문
인간이 느끼는 제일 짙은 슬픔이란 시간에서 비롯된다. ‘몽상’이라는 작품은 중력처럼 맞설 수 없는 시간의 절대력을 받아들인다.
자연의 순리에 굳이 대들지 않고 나를 맡기는 태도가 이전의 저항적이던 시인들과는 다른, 청춘의 새로운 현상이다. 강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강하다는 모순어법의 경향을 주도하는 것이다. 철학과 이념이 시들해진 현재에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은
이러한 니힐리즘이다. 허무한 것은 패자의 기분이 아니라 승자의 분위기이다. 바라는 것이 없기에, 그래서 잃을 것이 없기에
안달하지 않고 유유히 시간을 견디는 것, 그 자세가 도리어 지친 젊음들에게는 굉장한 의지가 된다. 과거의 선구자적 시인은 이
시대가 딱히 찾지 않는다. 현재 요청되는 것은 서늘한 가속도의 시대를 천천히 관조할 줄 아는 나른한 작법이다.
전부 가까이 있었습니다.
쉬운 말들이 쏟아졌습니다. 묻지 않은 약속을 가득 쥐어주고 갔습니다. 이따금 내가 당신의 어디에 있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내가 주류일 때.
내가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하자 그림자들 분주해집니다. 수많은 두둔이 자취를 감춥니다. 질문이 늘어나고. 몰이해를 얘기하는
시선이 자주 도착합니다. 발자욱들 멀어지는 소리는 비주류가 됐음을 알려옵니다.
실망은 날카롭습니다. 이리저리 밤이 할퀴어 있습니다. 여러 마음을 폐기해야 합니다. 혼잣말 같은 것으로 지피기 어려운
잠이 있습니다, 오래 꾸지 못한 꿈에 대낮은 흐려지지만 몇몇 얼굴 선명해집니다. 쉽게 동요하는 표정들 지워집니다.
꿈으로 입장합니다. 소지품 같은 관계는 모두 두고 오기로 하고서야 비로소 입장할 수 있습니다. 반복합니다. 고개의 방향을 자주
정정하지 않는 이들의 얼굴을, 여러 번 답습합니다.
오래 감고 있던 눈을 뜹니다.
- ‘답습’ 전문
‘한’은 우리 정서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민족적 역사적 감수성이다. 요즘처럼 찬란한 시대에는 한의 서정이 화석이 된 듯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풍경은 근접해서 보면 슬프거나 비틀어져 있는 것이다. 시대의 모순을, 축적되어 온 사회의 갈등을 고스란히
겪어내야 하는 젊음에게 한은 여전히 존재한다. ‘답습’이라는 작품은 주류와 비주류의 삶을 서늘하게 대비시킨다. 상류 1%가
세상을 움직이는 현실을 젊음은 일찍 깨닫고 대항할 생각조차 접어버리는 지금 아웃사이더의 심정이 세찬 감응을 일으킨다. 개인의
비탄이던 한이 사회적 비극으로 번져나가는 현대의 단면도가 작품에 수려하게 스며 있다. 현재의 청춘은 안쓰럽다. 기성세대처럼
세기말의 유희적 순간을 누리지도 못하며, 명랑한 채로 일탈적이었던 시대를 동경할 뿐, 현실은 아스팔트 정글의 냉정함으로 가득한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하든 그렇지 않든 비는 낙하했다
치졸하건 장엄하건 비극은 비극이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듯 생의 단면에 어떤 표정으로
남아 있는 감정들 그 자체로 주목돼야 마땅했다 싸늘한 등짝 없었던 이 있는가 응당, 밤마다 마주하는 불안 때문에 나의 날씨를
외면하는 일은 회피하 고 싶다 너무 졸렬하잖은가 나를 너무 쉬이 저버리는 나는
폭우는 끝까지 폭우가 되는 일에 저를 쏟고
(마르는 일은 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때 치러지는가)
나는 나를 부추겨 일어난다
-‘폭우의 28번째 단면’ 전문
‘폭우의 28번째 단면’은 씻김이라는 비의 속성에 기대고 있다. 이 시대의 집단적 슬픔은 워낙 방대하여 그 흥건한 아픔을 개인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패배주의가 범람한다. 결국 이 작품처럼 구원이 인간계가 아닌 자연계로부터 찾아진다는 것이
그나마 사람들에게 잔존해 있는 낙천이다. 쌓임의 미학인 눈이 아니라 씻김의 치유를 지닌 비를 소재로 삼은 것은 공동의 애수에
대한 시적 극복이다. 폭우가 그 절절함으로 몰입되어 스스로를 닦아내듯 시인도 그 자연의 순리로 고단한 내면을 소독한다.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늘 환하게 켜져 있는 풍경에서 오히려 불면의 두려움에 침잠하는 현대인에게 자연계의 사물들이, 장면들이 자아낸
이치는 교양이나 문명으로 얻을 수 없는 위안의 획득을 선사한다. 자연계로의 귀의가 아닌 같이 아픈 존재로서 풍경을 바라보는 현대적 심상의 완성이기도 하다.
가득 찬 달무리를 성공적으로 다운로드하셨습니다. 불면하지 않으려면 조도를 조절해 주세요. 조도가 음계처럼 줄어듭니다
나는 오늘 몇 번이나 희미했습니까. 희미해져 가는 것들은 왜 삭제가 어렵습니까
용량이 부족할 때마다 나는 잠든 척했습니다.
매일 아침 습관처럼 켜졌습니다.
- ‘버릇’ 전문
디지털 시대이다. 인공지능을 제국주의의 또 다른 식민 수단이라고 걱정하는 현자들도 있고 오히려 인류의 진화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호응을 얻는 것은 디지털이 꿈꾸는 목표가 아날로그라는 감성개념이다.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닌 적극적 서정의 회복으로써 디지털 세상을 다루되 아날로그 감성, 인간적 번뇌를 다루는 노선이 현대문학의 새로운
부문이다. ‘버릇’이라는 작품이 문명과 존재의 조화를 꿈꾸지는 않지만 그렇듯 시대는 시대대로, 나는 나대로 다투지 않는 평행선을
이루며 지내는 것이 현대인의 노선임을 제시한다. 문명에 감성으로 맞서려했던 이전의 감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현대에서 싸움의
의미는 잠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이러한 경쟁 논리는 개인에게는 벅차다. 이를
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버티는 것, 인내하는 것, 사색을 멈추지 않는 것이 이 시대 공감의 새로운 영역이다. ‘달무리를
다운로드’하는 것이 예전의 음풍농월과는 다른, 불면의 우울을 뜻하지만 시인은 자발적 체념이라는 자기 방어 기제를, 현재를 살아
낼 속성으로 탐색한다. 힘을 내라는 말보다 너무 힘내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가 오히려 감동으로 여겨지는 달라진 시대상에서
이러한 시적 태도는 공감의 심도를 지닌다.
한때 생각한다 외로움은 권력 같은 거라고
신봉자들은
새벽이면 길게 줄서서
들었던 연설을 듣고 또 듣고
가끔 울었다
이따금 유쾌하지 않아도 복종하는 일이 외려 더 쉽다
적당히
타일러지고 지배되고 싶다
사유 없는 밤이 나를 몰아낸다
- ‘결탁’ 전문
‘결탁’은 훨씬 직관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확장시킨다. 이 시대는 나이트 서커스와 핏빛 자오선 사이에 놓여 있다. 사람들의 시간은
시스템에 묶여 있는 낮과 분노와 공허가 교차하는, 그래서 유희와 전복을 희망하는, 밤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밤의 일탈도
다시금 시스템으로 흡수되는 낮이 기다리기에 무의미한 날들. 이러한 심경을, 유행하는 자기 개발식의 웅변이 아닌, 순응이라는
우아한 굴복으로 대하는 자세는 낮과 밤의 괴리에서 지친 현대를 위한 처연한 응원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에서 위안을
받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이므로 웅변보다, 선언보다 도리어 훨씬 강력한 울림을 전한다. 사랑할 틈은 없어도 외로울 겨를은 있는
지친 고독의 시대에 거기서 억지로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자아를 맡김으로써 바닥까지 침잠했다가 그 반동으로 높이 솟구쳐 부활할
여지가 우울 속에서도 피어난다. 이 우울들은 멜랑콜리아에 가깝다. 우울에 매력을 더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이훤은 가만히 시의
21세기적 영역에 도착해 있다.
둥지에 들립니다
새벽마다 잦던 잉태를 기다립니다
언어가 부화를 마치려면
자주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사람을 덮어주고 길러 온 세상을 묻혀줍니다
시시로 초목 같이 서서
세계를 가려줍니다
가지처럼 흔들리는 몸짓은
오늘을 닮았군요
때때로 위태해지는 나를 모방하며
저들은 제 얼굴도 모른 채
오래 순종합니다
잉태되지 않은 자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의식은 왜 항상 하루씩 늦습니까
빛이 없는 곳
귀로 먼저 조소되는 세상
엇나가는 풍경은
부서지지 않은 벽 때문입니까
기울어진 세계 때문입니까
계절마다 두드려 오는 절경들은
왜 어떤 예고 같습니까
깨어나는 세계의 뒤통수로 광명이 덮쳐옵니다
-‘예고’ 전문
이제는 로봇과 겨루며 우주를 꿈꾸는, 기계문명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대이다. 현실은 늘 디스토피아였다. 시는 은유와
관조로 감성적 이상향과 현실적 슬기를 제안해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계문명에 압도되어 시는 주도자로서의 영광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인간과 자연 속의 규칙과 진리를 포획해 내는 이훤의 필치는 시인의 소명을, 그 깨우침의 명맥을
진보시키고 있다. ‘예고’라는 작품은 그처럼 마모되어 있는 시인의 역할을 재생시킨다. 어른들의 시대가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남성성의 세기였다면 현재는 여성성의 가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부드러운 여성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로부터 잉태되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크고 넓은 화두에만 몰두하여 여성성을 도외시하는 작법들은 순간의 경향은 될 수 있겠으나
사람들에게 와 닿는 것은 여성성의 아름다운, 그래서 훨씬 강인한 생명력이다. 그 진가를 헤아리고 필력에 용해시켜 놓으려는
시인의 자세는 현대문학의 의미 있는 구역이다. 이러한 교집합의 미학은 ‘고리’에서 가상과 현실의 일치로 다시 구현된다.
고집스런
고독
거울
가벼움
가로로 선
기억
결정적
겨울
고스란해진 눈가, 어떤
가로 같던
거리
거닐고 거닐어도
결국 꿈이 가로채가는
공간
기어코, 가상으로 변해버린
-‘고리’ 전문
우리가 자각하는 현실과 생각으로 만들어 낸 가상현실이 구분되지 않고 서로 오가며 겹쳐지는 것이 현대의 모습이다. 현실에서는
조용한 사람이 컴퓨터 게임 같은 가상현실에서는 거친 캐릭터로 자신을 감추는 것처럼 현대는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그렇게 하여 가상현실로 남루한 실제 현실을 잊는, 이런 과정에서 가상과 현실이 서로 합쳐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현실 도피가 아닌 개인적 낙원이 건축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자조적이되 그 또한 현실을 견딜 힘이 된다는 관점이 이 작품의
수확이다. 극복이 아닌 포기와 타협이 오히려 혜안이 되는 것이 현대인의 감성이다. 현실을 배회하며 명확한 정답을 찾는 것이
개인적 사회적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도시의 삶에서 자조가 관조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해탈적 작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남성성과 여성성, 가상과 현실, 그 이질적 단면을 하나로 융화시켜 순순히 현재의 복잡한 인간계를 헤쳐 나가려는 시적 자아는
교훈보다는 공감을 찾는 시류에 문학적 포만감을 건넨다.
읽는다, 자꾸, 문장을, 거꾸로
시간 같다, 어떤 문장은
되뇌었다, 여러 번, 잠들 때까지, 일어나자마자
잠들 때까지.
당도할 때마다, 문장 끝자락에,
부딪쳤다, 닿을 때마다
다시 첫 단어, 부딪쳤다, 셀 수 없이, 마주한, 그 시간의,
아니, 그 문장의.
감겨온다, 눈이
사 라 지 는 문 장
왔다, 아침이
시작된다, 다시, 네가
동일하게 작문되는, 또 하루
끝없는.
-‘문장, 읽히는, 거꾸로’ 전문
‘문장, 읽히는, 거꾸로’라는 작품은 지금 세대가 문학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모두가 새벽이 되면 시인이 되는 현대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과거의 개념이 아닌 다시 또 현재에도 적용되는 용어이다. 포기하고 잃어버린 것이 많은 청춘에게 새벽 SNS에
올리는 글은 그나마의 자기 위문이다. 번뜩이는 지성이 있지만 루저의식이 팽배하고, 이는 백석에 대한 동경으로 환원된다. 그렇게
현실의 고단함에 박제된 천재라는 혼자만의 자화상은 이상을 여전히 소환시키고 있다. 시적이며 동시에 산문적으로 시대와 서정을
얘기하는 것은 이 순간 젊음의 문학적 갈망이다. 이훤이 유의미한 필력에 도달한 것도 이 현대 감성을, 시대정신을 공감이라는
요새에 축조한 힘이 뒷받침한다. 퇴고를 하듯 내면을 가다듬는, 나약해 보이되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시대의 청춘 표상을 기다리는
젊은 현실에서 이훤은 그만의 명확한 영역을 만들었다. 시의 현실은 폴 오스터의 묘사와 같을 것이다. 태양은 과거이며 지구는
현재이고 달은 미래이다. 문학의 찬란함이 퇴색한 듯 보여도 서늘하게 가다듬은 눈부심은 시의 부활을 이룰 것이다. 야위었다가
새롭게 충만해지는 문장은 달의 궁전과 닮아 있으며 그렇게 이훤은 이 순간도 차오르고 있다.
- 끝-
약력:
월간 <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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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아텍 서무과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