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이 수필가

조회 수 6937 추천 수 5 2015.07.30 09:03:46

                        자연과의 상생을 통한 존재와 정체성의 확인

                                  이숙이의매실과 눈깔사탕작품세계

 

 

                                                                                                    강 정 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1. 여는 말

    요즈음의 세상은 모든 게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새로운 변화 속에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문자나 대화를 듣다 보면 새로운 감각과 이성은 있을지언정, 옛것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새로운 것에는 첨단기술 디지털 시대가 주도하고 있다. 혁명적인 변화, 코페리니쿠스적 전환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것에서의 정보화 시대, 갇혔던 자신의 모습을 문자로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가 정보화 시대에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키치Kitsch와 퓨전Fusion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젊은이들과 함께 공유할 문화에 대한 욕구가 싹트게 된다. 정신의 환기를 통해 쇠잔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욕망과 장치가 바로 문학을 포함한 문화이다. 이는 아름다운 영혼을 꿈꾸기 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필작가 이숙이는 4부로 만든 제1수필집 매실과 눈깔사탕을 한·영판으로 내놓았다. 작품들을 읽다 보면 그 주제는 바로 자연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님을 간파하게 한다. 어쩌면 아름다운 영혼을 꿈꾸기 위한 작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독자는 그녀의 수필의 행방을 따라가며 미적언어의 향연에 탐닉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작가 이숙이의 수필을 음미하노라면, 그녀가 치열한 삶과 문학의 현장에 서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그녀의 작품은 때로는 비감하리만치 인간적 고뇌에 함몰하게 하고, 수필적 체험의 확대를 통해 삶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찾게 하거나, 시적 분위기나 낭만적 내적감각에 감응하여 신비적 엑스터시ecstasy까지 두루 맛보게 한다. 또한, 시간적 질서를 가로지르는 희열과 정서적 회감에 젖게도 한다. 작가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수필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1인칭에서 출발해서 거의 1인칭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수필은 작가와 현실의 정서적 등가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 자기 관조와 자기투영이라는 수필의 지향은 다난한 현실 위에 구축한 정서적, 사변적 깃발을 꼽게 한다.

   

2. 들어가기 

   수필문학에서의 자기 관조는 가장 원초적인 출발이다. 아무리 시대가 급변하고 새로운 문예사조가 발생해도 수필문학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진행된다. 어쩌면 이런 원시적 태도에서 한치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게 수필문학의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자연은 결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필요에 따라 임의로 훼손하고 있다. 편해지기 위해 화학물질과 고유한 품종을 마음대로 임의변경시키고 있다. 그리고는 고상하게 인간을 위한 지배니 소유니 마음대로 말을 함부로 붙인다. 훼손은 말살이다. 말살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받는 혜택을 스스로 잃게 하고 마는 무모한 행위이기도 하다.

 

   올봄에 심은 묘목들이 여름 동안 키가 3피트나 자랐고 몸통도 제법 굵어져 있다. 가을이 되니까 잎이 떨어져 줄기만 서 있다. 푸른 잎을 달고 있을 때나 알몸을 내놓고 서 있는 지금이나 사랑스럽기는 똑같다. 그렇다고 잎이 없다 해서 그냥 있을 수는 없다. 겨울잠을 자기 전에 허기지지 않도록 밥을 잔뜩 먹여 놓아야 한다.

   거름이 없으면 농사는 지을 수 없다. 비료를 주든지 아니면 똥이라도 주어야 나무든 채소든 다 잘 자란다. 하지만 화학비료로 키우면 유기농이 될 수 없다.

   우리 집에는 나무가 많다 보니 쇠똥과 닭똥이 작은 동산처럼 항상 쌓여 있다. 얼마 전 길 건너 다이애나 집에서 말똥을 가져와 지금은 말똥산 하나가 더 생겼다.

                                                                                                                -<똥이 약이야>에서

 

   남들은 편해지기 위해 농약과 비료를 사용한다. 그것을 선호하며 시대의 급변함에 따라 쉽게 일하려고 한다. 이러다 보니 다른 정보를 위해 컴퓨터를 열어 놓고 더 독한 농약과 강한 비료를 찾아내어 사용한다. 하지만 작가 이숙이는 남편과 함께 냄새가 고약한 쇠똥과 닭똥 그리고 새로 생긴 말똥까지 섞어 나무에 한 삽씩 퍼준다. 손수 자청한 일이다. 그런 다음 날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도 냄새는 여전하다. 무슨 모임이 있을 때는 이 냄새 탓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이 방법을 택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 바로 자연과 함께 상생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을 쓸 때 똥이 차기를 기다려 똥통에 넘치도록 퍼 담아, 지게 양쪽에 걸어서 밭에다가 주었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어머니도 지게를 하나 얻었다면서 손수 똥지게를 지고 걸을 때 출렁출렁 똥이 튀었는데, 옆을 따르던 어린 작가는 인분이라 냄새가 역겨울 만큼 지독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런데 작가 이숙이는 코를 쥐고 달아났던 그 방법을 나이가 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가장 원초적 자기 관조이다. 아무리 시대가 급변해도 변하지 않는 도덕적 관념, 바로 사랑애인 것이다.

 

   나뭇가지마다 매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앞으로 더 커져야 하겠지만 그중 통통한 것을 골라 한 알 따본다. 매실은 그냥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다. 효소를 만들거나 약의 원료로 쓰이는 열매다. 예쁜 열매를 손안에 꼬옥 쥐어 보는데 불현듯 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외출하셨다가 돌아올 때는 늘 사탕을 사 들고 오셨다.

   옛날 눈깔사탕 알 크기가 지금 내 손에 있는 매실만 하게 컸다. 입에 넣으면 입을 오므릴 수가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 큰 사탕 하나가 어릴 적 내게는, 누군가가 다이아몬드와 사탕을 바꾸자고 한들 바꾸었을까. 그만큼 충족감과 기쁨과 달콤한 맛까지 주었으니 눈깔사탕 한 알은 내게 최대의 행복이었지 싶다. 그 추억처럼 매실이 사탕인 양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이는 순간이다.

                                                                                                                              -<매실과 눈깔사탕>에서

 

   매실은 길고 단단한 가시에 황매실 혹은 청매실은 두 개, 세 개 혹은 네 개씩 올망졸망 붙어서 나뭇잎에 가려져 있다. 열매를 따려다가 무기와 다름없는 가시에 찔리기가 어찌나 쉬운지 한 번 찔리기도라도 하면 진땀이 나도록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작가 이숙이는 매실나무를 돌보는 동안 꽃이 피고지고, 열매 맺히는 과정을 보면서 무언가 감미로움이 내 안에 가득 고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작가는 이를 나무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열매가 되고부터 매실나무는 거의 백여 일 동안 우주의 원소인 햇볕 아래서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쐬고, 물을 마시면서 커간다. 그 사이 새들은 열매의 향기에 취한 듯 나뭇가지에 사뿐히 앉아 즐겁게 지절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나무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자만심을 탓한다. 그래도 열매가 눈깔사탕 알 만큼 커지고, 열매를 따는 황금적 매력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순간 필자는 효소를 만들기 위해 병에 담아놓은 매실과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눈깔사탕을 비교하며 빙그레 웃게 한다.

   그렇다. 수필문학은 변화 속에서 이질적인 것을 탄생시키지 못한다. 가장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 믿었던 신앙과도 같은 원초적 믿음을 버리고 낯섦을 선호하려 해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작가는 눈깔사탕 크기만큼 매실을 보면서 황금적인 매력, 그 모든 것은 경제적이라는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만약 이게 없다면 수필은 하나의 허상일 뿐이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싶은데 며칠 전부터 여름철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당의 흙이 패고 빗물이 도랑처럼 흘러 밖에 나갈 수 없어 따분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퍼붓듯이 내리는 장대비를 마루에 서서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까맣고 작은 뱀들이 비와 함께 땅에 떨어지면서 꿈틀대며 튀어 오른다. 방에 뛰어들어가서 앉아 있는 식구들에게

   마당에 뱀이 많이 있어요!”

   나는 어머니 옆구리로 파고들면서 뱀에 물이기라도 한 듯 호들갑을 떨었다. 책에 뱀이나 쥐, 송충이 그림이 있는 부분은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겁쟁이인 내가 실제로 뱀 무리를 보았으니 놀란 것은 당연했다.

   온 식구가 우르르 나가서 기어 다니는 뱀들을 보고 저것, 미꾸라지 아니냐!”

   온 식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장대비 속에서 미꾸라지를 통에 웃으며 주워담느라 난리 법석이다. 그것으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미꾸라지 음식을 만들고 횡재한 듯 만면에 희색이 가득해서 상에 둘러앉아 특별감사기도까지 했다. 나는 밥그릇을 달랑 들고 건넛방으로 갔고, 미꾸라지는 새끼뱀이라고 머리에 심어 버렸다. 그랬으니 해마다 식구들은 보양식이라며 미꾸라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는 그 공포의 음식은 절대 사절했다. 그런 마음이 초지일관 60여 년을 밀고 나갔다.

                                                                                                                                                   -<추어탕>에서

                                                                                                                              

   작가 이숙이는 생각지도 못한 추어탕을 먹는 일이 발생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고, 재미있게 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이 수필이 등단작품이 되었다.

   문학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이 바로 추어탕 식당이었다. 음식 타박할 나이도 아니고 미꾸라지 형태가 보이지 않게 갈아 만든 국이라 말도 못하고 먹는 시늉이라도 내자 싶었을 것이다. 음식을 본 순간 온몸에 땀이 나는 듯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어릴 때의 새끼뱀 사건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식당 벽에 걸려 있는 추어탕의 장점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리고는 애써 몸에 좋은 음식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추어탕이 위로 스르르 들어가게 했다. 위가 제 역할을 하기도 전인데도 ~, 몸에 좋은 약이 되나 보다라는 묘한 느낌이 최면제가 되어 주는듯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포의 음식이 아닌 뜻깊은 음식이라 싶어졌다고 느끼게 했다. 일종의 환각작용이 문우를 보면서 일어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딸 내외를 LA로 불러내어 뚝배기에서 펄펄 끓는 추어탕을 함께 먹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옛날 작가가 간직하고 있었던 추어탕에 얽힌 사연도 이야기해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어머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던 아련한 향수를 그리고 있다.

   수필문학은 일상의 자잘한 화소들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여기에는 삶의 진실을 그대로 그린다. 진실은 바로 진정성이다. 그리고 그 진실의 근저에 있는 불변의 진리는 바로 사랑이다. 이렇게 수필은 있는 그대로를 묘사함이 아니라, 작가의 체험을 언어로 형상화하면서도 미적 세계를 구체화한다.

   나는 오솔길을 걸으며 어느덧 산 구름이 되어 친구의 집마다 찾아가 백일홍과 채송화에 이슬을 맺게 한다. 그리고 가슴 떨리는 기분으로 새날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이파리마다 입맞춤하기에 바빠진다.

   나의 입맞춤에 꽃들은 터질듯한 기쁨으로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보리깜부기를 훑어 먹어 새까만 입을 벌리고 까르륵 웃어대던 고향 친구들은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 생각하니 서글픈 웃음이 저절로 난다. 추억의 날갯짓은 다시 태평양을 향해 나른다.

어린 딸과 아들 손잡고 남태평양 작은 섬을 디딘 첫날, 환상의 나라에 온 듯 신기로움뿐이었다. 수많은 갈매기가 무리지어 나르고 해변에 서 있는 나무마다 어찌 그리 예쁘고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해 있던지-.

                                                                                                                                     -<노을>에서

 

  작품 <노을>은 한 편의 짧은 서정적 수필이다. 작가 이숙이는 심성이 곱다. 대인관계가 언제나 좋아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늘 상대방의 편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여 교만하지 아니하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몸가짐은 연약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는 당당하다. 이런 성향은 어디에서부터 연유함일까? 당연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고운 심성과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운 정직한 이치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 폭발할지 모를 불발탄을 늘 가슴에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전자에 속하는 이러한 심성을 가진 작가는 노을빛에서도 고향과 미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으리라.

   매실농장에서 일하다가 보면 노을을 자주 대하게 된다. 매실은 작가에게는 동력의 횃불이며 내일을 여는 노래가 된다. 그러다 보면 농자의 노을빛에는 고향 마을 정자에 모여 있는 할아버지의 장기판과 개울가가 나타난다. 이렇다 보면 자연스럽게 황금가루를 매실 이파리 위에 뿌리는 상황을 꿈에서도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간다. 잠자리에서도 꿈에 나타난 노을은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고, 나르는 갈매기와 함께 고향을 찾아간다. 그냥 고향이 아니다. 작가는 사무치도록 그리움인 고향 초등학교의 꽃밭으로 달려간다.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코스모스 꽃이 한들한들 춤춘다. 그곳에 교회 종탑에 깃 펼친 두루미 한 쌍과 마을 보리밭 중앙에 밀레의 만종처럼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조용히 서 있다.

   다시 노을은 옛 시간을 이어준다. 마음속 계절은 추운 겨울을 거부하는지 겨울의 짧은 석양이 등 뒤에 비친다. 다시 찬바람이 부는 고향 산사의 풍경소리가 적막함 속에 떨고 있다. 작가는 고향 집 뒤뜰에서 피운 예쁜 감을 소쿠리에 담아 산사로 달려간다. 산사의 고요함을 그리도 좋아하던 소녀였으니까.

 

  돌산이었을까? 흙으로 빚어진 바위였을까?

   비와 바람과 오랜 세월이 협곡을 만들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놓아 희귀한 모양이 되어 있다. 구불구불 갈라진 틈새로 태양 빛이 스며들 때 프리즘 작용의 신비로운 색상과 모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갈라진 바위틈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는 위로 향해 젖혀져 있고 카메라 들어 올린 두 팔도 위로 뻗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진 무늿결 바위 모양에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많은 관광객이 비좁고, 조금은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한 발짝씩 움직일 뿐이다.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수없이 셔터를 누르는 모습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위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고 어깨가 닿도록 바싹 붙어 있는 옆 사람을 보면서 조금은 숙연한 미소로 말한다.

말을 잊은 채 조금씩 움직이며 틈을 빠져나온 후 표현을 말로 할 수 없으니 긴 한숨으로 하는 듯했다. (중략)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경관이라기보다 기이하고 멋지게 갈라진 바위산 틈새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무늬는 만고풍상의 긴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로 여기는 이곳에서의 흥분이 가시고 트럭 뒤칸에 앉아 찬바람과 흙먼지 날리며 나오는 동안에도 얼굴마다 경건한 미소가 그대로 남아있다. 애리조나의 상큼한 공기가 신선하게 코를 타고 허파 깊숙이 파고들어 온다.

 

                                                                                                    -<협곡에서 본 미소>에서

 

   이 작품은 201468(), LA에 소재한 작가의 집에서 ()부산여성문학인협회와 한국문협 미주지회가 공동주체에 영상 수필로 소개된 작품이다. 앤탤롭캐년Antelope canyon에 다녀와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필문학의 정수이다.

   수필은 경험을 통한 실질적 언어를 통해 인간의 가능성과 존재의 위엄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창조적 노력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논어에서도 자연과 합일된 시를 읽지 않으면 말할 게 없다고 했다. 짧은 이 한 편의 수필에는 인간의 질서가 있고, 만고풍상에 만들어진 붉은 협곡에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교감이 들어가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자연이나 인간의 역사적 현재는 언제나 피와 땀과 먼지로 가득 차 있는 고통과 기록의 세계이다.”로 본다. 그러므로 현재의 소멸은, 새로운 현재의 끊임없는 형성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굳이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낼 필요는 없겠지만, 수필은 미등일망정 나아갈 길은 인간과 자연은 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인디언들은 정령精靈을 숭배하고 자연을 해 끼치지 않고 함께하는 이치가 낯설지 아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수필은 시적 이미지와 수필적 담론을 결합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게 바치는 목관악기와도 같다. 또한, 작가가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상상력은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감명을 주게 한다.

   

   사막의 열기에 흙이 푸석푸석 말라 있다. 물을 듬뿍 뿌려놓았다가 골을 타고 얻어온 도라지 씨앗을 뿌린다. 두 달 전에도 농장 한구석에 도라지 씨앗을 뿌렸다. 씨앗이 쑤욱 자라나서 청보라빛 꽃이 만발한 도라지밭이 되기를 상상하면서 열심히 물을 주었다. 그런데 아직 싹이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흙을 뒤적여 보니 흙 속에서 씨앗이 꽤 부풀어 있는 모습이 곧 싹을 틔울 것 같아 안심된다.

도라지는 우리나라의 양지바른 산야 전역에 걸쳐 분포돼 자생하는 식물이다. 이 한국산 도라지 씨앗은 문우를 통해 얻은 것이다. 도라지 뿌리는 약이기도 하고 영양덩어리라고 하면서, 도라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중략)

옛날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전이 없자 포기하려고 결심한 날 저녁,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해 보고자 했다. 문우의 부모님께서 기르는 도라지 꽃을 모조리 잘라 꽃다발로 만들어 주고 왔다. 며칠 후에 그녀에게서 만나자며 그의 사랑을 받아주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유는 이 세상 그 어느 꽃이 그처럼 청초하고 소박할 수 있느냐며 그 도라지 꽃다발의 아름다움에 그녀의 마음을 던져 버렸다고 했다. 두 사람이 맺어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괜스레 나의 가슴조차 잠시 설레졌다.

                                                                                                         -<도라지가 맺어준 사랑>에서

                                                                                                                                                       

   황톳빛 사막에서 매실농장을 경영하며 도라지 씨앗을 뿌린다. 바로 고국에 대한 진한 그리움의 소산이다. 도라지는 초롱꽃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도라지 뿌리는 거담제 혹은 진해제로 쓰이고, 식용으로도 다양한 요리 이용법이 개발되어 있다. 인삼은 제사상에 안 올려도 도라지는 올리는 음식이다. 인터넷을 통해 도라지에 대해 얼마나 연구했는지 도라지의 구분부터 사용하는 방법까지 두루 섭렵했다.

   하얗게 볶은 도라지나물, 초고추장에 그대로 무치면 도라지생채, 얇게 썬 다음 찹쌀풀을 발라 말려 기름에다 튀기면 도라지자반, 꿀이나 설탕에 졸인 것은 도라지정과라 한다. 그것뿐만 아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뿌리를 말려 밥에 얹어 먹기도 한다. 특히 절에서는 스님들의 식탁 위에 자주 오르는 반찬이기도 하다. 도라지를 약재나 식용으로 쓸 때 반드시 껍질을 벗겨야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라지 뿌리에 있는 사포닌은 만 배의 용액에서도 완전한 용혈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피를 엉기게 할 만큼 강한 작용을 한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독자가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도라지의 특성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처녀 때 있었던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부처님 같은 얼굴의 남편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남의 일에 왜 자신의 가슴이 설레졌을까. 문학의 보편성이 그러하듯 작가는 체험을 토대로 확대 분재하는데, 작가는 가슴속에 꼭꼭 넣어 두었던 막연한 그리움을 담아낸다. 작가의 체험 진폭이 쏠쏠하다. 여하튼 자신이 평생 체험하지 못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한 재미를 독자에게 주게 한다. 포스넷이 말한 바 있듯 문학이란 산문이건 운문이건 간에 상상의 결과라고 한 것을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3. 나가며

     작가 이숙이의 수필은 소재의 새로운 해석과 이해를 위한 작가의 진통과 고뇌가 보인다. 거세된 회생의 이론이 아니라, 작열하는 진통과 고뇌로부터 피어난 꽃처럼 순편하고 깊이가 있다.

   자신의 수필은 인생의 해석과 생명의 이해를 위한 정서와 사상을 하나로 용해시키는 문학이며 인간학일 것이다. 곧 작가의 인생표현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바는 이런 인생표현과 생명 해석이라는 수필 이념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키고 구현시키느냐에 있다. 이는 화자의 언술이 자칫 생경하고 추상적인 이념의 노출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수필이 정서와 사상 속에 용해되어 문학성을 떠난다면, 그것은 한낱 무용의 공염불이나 불모의 사막으로 화하는 신변잡사로 추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가 이국의 땅에서 살아오면서 언어적인 고통과 먹고 살아야 한다는 환경은 평생 머리에 얹혀있는 물통이었을 것이다. 그게 수필 매실과 눈깔사탕을 잉태하게 했고, 그 환경은 수필 창작에의 어머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생명은 위대한 진통에서 태어나듯 좋은 수필, 훌륭한 수필은 소재를 작가의 정서와 상상 속에서 여과시키게 하는, 창작에의 진통과 고뇌로부터 피어난 꽃이라 하겠다.

   명심보감의 격양시擊壤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평생 눈썹 찡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이를 갈 사람이 없으리라. 위대한 명성이 어찌 저 미련한 돌에다 새기는 데에 있을까. 길바닥 행인의 입술에 비를 이김에랴.” 돌에 새기는 명성은 참으로 위대한 명성이 아니다. 그렇다. 구비口碑에 새겨지는 명성이야말로 비석에 새기는 명성을 능가할 것이다. 이숙이의 수필은 비석에 새겨지는 걸작이 아니어도 잔잔하게 독자의 가슴을 파고드는 진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프랙털fractal같은 카오스chaos의 미로에서 인간은 늘 서성인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아가기 위해 혼돈에서 탈출해야 한다. 화자의 글은 늘 진정성이 보인다.

    작가 이숙이의 행보가 주목된다. 아름다운 수필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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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출생.

크리스천문학 소설부문 .

열린문학. 서울문학 수필부문 당선

한국문협 회원 및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제15회 국제예술문회협회 수필부분 금상

저서: <매실과 눈깔사탕> 

          <콩만큼 점수 받은 날>

 

 

 

 

 

 


이훤

2015.08.12 15:33:08
*.184.170.128

귀한 해설이네요.

이 작가님의 작품세계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승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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