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젖다
유경순
흙이 긴 숨을 들이마신다.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들듯
잠자고 있는 기억들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세상을 다시 짓는다.
지난봄 미처 만나지 못한
묵은 것들이
질질 끌려
길도 없는 곳으로
흐느적거리며 몸을 내민다.
젖고 또 젖으며
누군가는 외면하며
또 누구는 혐오하고
누군가에겐
짓밟히고 마는
비비 꼬인 몸에
잠시 축인 봄비는
겨우내 곪은 진물을 덮었다.
촉촉이 적시며
땅바닥의 어둠과
희미한 생각의 끝자락을 만났다
비 갠 화창한 어느 봄날
황토 흙담 구석에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들의 행렬
그 속에서 나를 보았다.
그는 안다.
자신의 존재를
봄비에 젖은
흙 부스러기였음을.
부푼 상처의 딱지 속으로
숨 가쁘게 밀려들던 찬비는
나에게 떠나는 법을 알려주었다.
겨우내 숨죽이던
땅속뿌리 사이사이에
흙이 되어 끼어있는
들먹거리는 생명들
거기에 있었다. 내가
봄비에 또 하나 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