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젖다

조회 수 266 추천 수 0 2025.04.25 19:59:25

봄비에 젖다 

                        유경순

 

흙이 긴 숨을 들이마신다.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들듯

잠자고 있는 기억들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세상을 다시 짓는다.

 

지난봄 미처 만나지 못한

묵은 것들이

질질 끌려 

길도 없는 곳으로

흐느적거리며 몸을 내민다.

 

젖고 또 젖으며

 

누군가는 외면하며

또 누구는 혐오하고

누군가에겐 

짓밟히고 마는 

 

비비 꼬인 몸에

잠시 축인 봄비는

겨우내 곪은 진물을 덮었다.

촉촉이 적시며

땅바닥의 어둠과

희미한 생각의 끝자락을 만났다

 

비 갠 화창한 어느 봄날

황토 흙담 구석에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들의 행렬

그 속에서 나를 보았다.

그는 안다. 

자신의 존재를

봄비에 젖은 

흙 부스러기였음을.

 

부푼 상처의 딱지 속으로 

숨 가쁘게 밀려들던 찬비는

나에게 떠나는 법을 알려주었다.

겨우내 숨죽이던 

땅속뿌리 사이사이에

흙이 되어 끼어있는 

들먹거리는 생명들

거기에 있었다. 내가

 

봄비에 또 하나 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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