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앞에서
유경순
커다란 마트의 굴렁쇠를 돌린다.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 수분 머금은 초록의 이파리들이 누워있다.
얇은 고무줄로 동여맨 묶음들이
저마다 팔을 뻗쳐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요한 안개 낀 거리다
눌러보고 집어보고 내던진 몸들이
방금 사라지는 멍을 안고 있다.
햇빛도 없이 열매 맺는 것들은
농부들의 효자가 되고
푹신한 솜 위에서 뿌리내린 약하디약한 흰 뿌리는
웰빙이라는 이름 아래 투명한 플라스틱 안에
전시되어 쌉쌀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낮은 산등성이가 생각난다.
천지사방 꽃을 피워가며 들숨과 날숨으로 자유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녹두부침개와
신상품을 선전하는
조금만 그릇의 샘플들이 식어가는 열기 속에 담겨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한입에 부어버린다.
무엇을 찾으려고 그 맛이 그 맛이야.
오 분 만에 뚝딱
뜨거운 물에만 넣고 끓이면 완성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거예요
맛보고 가세요
빨리도 지나쳐 버린 삼십 대의 날들을 닮았다.
이건 먹으면 안 된다
이건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고
온실 속에서 태어났지만
숨이 막히며 힘들었던 날들이 많았다고
뿌리째 뽑혀 가지런히 누워있는
얇은 투명한 몸집들이 눈을 내리깔고 모로 누워있다.
어느 집 도마 위에서 날카로운 칼로 다져질 때
개운해지는 마음 이해하나요
희미한 수조 유리에 비친 커다란 시장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눈뜨고 살아있는 다리 긴 바다게 들의
저마다 외마디가
부글부글 가느다란 줄을 통해 뱉어진다
모서리에 걸린 뜰채로 옮겨진다.
짓누르는 다른 게들의 발길질이
자기들 눈을 치고 옆구리를 할퀸다.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내 눈과 마주쳤다.
툭 튀어나온 눈을 돌리며 표정 없는 모습으로 뒤돌아서는
게들의 느린 뒷모습을 오후의 시장에서 만났다.
뜰채에 걸려있는 작은 낙지 한 마리
흥정하는 몸값의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굴러가는 빈 장바구니의 속에 묻힌다.
하얗게 뿌리내린
기다란 파 묶음
삐죽삐죽
내 장바구니에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