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하루 (단편소설)

조회 수 68 추천 수 0 2020.09.12 12:29:29

 

 

부부의 하루

 

 

 

이경미

 

 

 

 

***

 

 321732239#. 삐삐삐삣 삣삐리리리. 쿵. 

 아파트 현관문은 필요 이상으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집을 토해낸다.

 전자음의 높은 피치는 힘든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주려고 전략적으로 프로그램되었으리라. 알맞게 촌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도호의 구두가 힘을 풀고 쓰러져있는 걸 보니, 내가 한걸음 늦은 모양이다. 

 “왔어, 누?”

 “응, 내가 조금 늦었네. 잠깐만 기다려.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도호가 언제부터 나를 ‘누’라고 불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인 것은 확실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별명이 누였던 것을 보면 말이다. 

 도호는 나보다 몇 초 늦게 태어난 쌍둥이 남동생이다. 몇 초 먼저 태어났을지언정 ‘누나는 누나이니 당연히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야단을 맞아오던 도호는 어쩔 수 없게 되자, 나를 ‘누나’ 대신 ‘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소한 다툼이나 쌍둥이 특유의 갈등이 없었던지라 어른들은 우리 둘 사이의 호칭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나를 친구처럼 대하거나 무시한 적도 없고 누나로 어렵게 대한 적도 없었으니 ‘누’라는 호칭은 어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저녁은 먹었니?”

 “됐어, 생각 없어.”

 도호는 냉장고를 뒤적이며 맥주 캔 몇 개와 주전부리 몇 가지를 챙긴다.

 “도랑 언니는 어제 왔다 갔다며?”

 나는 베란다에 널린 빨래를 걷어 들이면서 말을 걸었다. 

 “어. 김치랑 잔뜩 갖다 놓고 갔더라.”

 “수연이 맡겨놓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나 보네.”

 시골에 사는 도랑 언니는 도호와 나보다 2살 위인데, 시집을 일찍 가서 대학생이 된 딸이 있다. 조카 수연이가 현재 도호네 집에 묵고 있는 터라 도랑 언니는 반찬이며 김치를 바리바리 싸 들고 딸 보러 자주 온다. 올케한테 딸을 맡기고 있으니 아무래도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눈치다.

 “도랑 누나가 누 갖다주라고 가져온 김치랑 뭐 반찬 몇 가지 집에 있던데, 다음에 올 때 가져올게.”

 도호는 맥주 한 캔을 다 비우고 소파에 앉는다.

 “뭐가 문젠데? 갑자기?”

 나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도호 입장이 더 불편하겠다 싶어서 일단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밖에서 술 한 잔 하자고 했을 텐데, 퇴근하고 집에 가는 중이라고 하니 굳이 집에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호가 혹 먼저 도착할지도 몰라 아파트 현관문 비밀코드를 알려주었다.

 

 “뭔데? 밖에서 못 할 말이?”

 “누군가 은행잔고증명서가 필요해서 며칠만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누는 어떻게 할 거야?”

 “재정증명서 같은 거?”

 “응.”

 “그러니까, 네 돈을 어떤 사람 통장에 입금하고 그 사람 돈인 것처럼 은행잔고증명서를 떼고 난 후에, 돈을 너 통장에 다시 입금한다?”

 “그렇지.”

 “누군가? 누군가라고?”

 도호는 아무 말이 없다.

 마흔일곱 살. 탄탄한 증권회사의 투자전략팀장인 도호. 그의 친구라면 유리처럼 투명하고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도호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사 부탁을 했더라도 고민할 도호는 아니다. 자기 선에서 가능한 액수의 돈을 꿔주는 한이 있더라도 의를 상하지 않을 정도의 단호함으로 거절할 도호이다. 

 “여자, 설마 여자 문제, 그런 거 아니지?”

 도호는 아무 말이 없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나의 첫 추리가 맞은 모양이다.

 “I-20 비자 받아서 떠난대.”

 “그래서, 뭐야? 여자 문제라는 거야?” “은행잔고증명서만 떼고 비자 신청만 끝나면 돈은 다시 돌려준다고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서류 준비할 동안만 빌려달라는 건데, 거절하면 와이프한테 직접 얘기하겠대. 일단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해놨어. 좀 거액을 요구해서.”

 나는 내 얼굴 근육이 녹아내리는 듯한 무게감으로 아무 표정도 지어낼 수가 없었다. 

 도호는 빈 맥주 캔에 눈빛을 꽂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다. 현관에 벗어 놓은 그의 신발과 똑같은 느낌으로.

 

 도호는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적어도 여자 문제는 없이 살 줄 알았다.

 도호와 올케는 십 년 전에 결혼했다. 여덟 살 연상의 올케를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둘 다 초혼이지만, 마흔다섯 살짜리 며느리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케의 친정 부모까지 반대하는 결혼이었으니 말이다. 올케의 친정 부모는 딸이 감당해야 할 시집살이가 어떤 것인지 아셨기에 차라리 아이 딸린 남자에게 보낼지언정 여덟 살이나 어린 초혼남은 안된다고 끝까지 말리셨다. 아들이 하나뿐인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대를 끊을 수 없다며 노발대발하셨다. 도호 조건이면 시집오고파 하는 처녀들이 줄을 설 것이라 믿으셨다. 

 올케보다 사랑에 올인한 쪽은 도호였다. 삼십 대 전반까지는 늘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삼십 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일에만 매진하면서 싱글로 지냈다. 훤칠하게 키가 크고 건강한 체구를 가진 도호의 연애와 결혼에 대해 부모님은 ‘좀 늦게 장가를 가려나’ 하는 푸념 정도일 뿐 전혀 걱정하지 않으셨다. 돈도 나보다 훨씬 잘 벌고 있었고 부모님 생활비도 넉넉히 챙겨드리는 효자였다. 오히려 노처녀로 낙인을 찍는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양가 부모의 결혼 반대가 극심해지자 올케는 제주도로 피신하여 3개월 동안 잠적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나이 많은 신부가 적어도 양심은 있다 싶으셨는지 한동안 안심하셨고, 그 틈을 타 도호는 정관수술을 해버리고 나타났다. 그의 정관수술로 모든 판이 깨졌다. 나이 많은 신부가 대를 끊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아들 때문에 대가 끊긴 것이니 둘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허락을 구했다.

 

 “그래서, 너 말은 지금, 어떤 여자가 은행잔고증명서가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하고, 돈을 안 해주면 올케한테 직접 연락하겠다?”

 도호는 기계적으로 고개만 약간 흔든다.

 “그건 협박, 협박 맞지?”

 “그래.”

 “그런 협박을 할 만한 사이가 된 여자란 말이지?”

 나는 상황 파악이 다 된 상태이지만, 도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도호에게 여자 문제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내 말이 맞니?”

 “거액을 요구해. 돌려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돈, 필요한 거니? 그래서 온 거니?”

 “아니야.”

 “그럼?”

 “큰돈이야. 와이프 모르게 통장에 손을 댈 수는 없어. 누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아. 급한 일이 생겨서 누한테 빌려준다고 얘기할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미안해.”

 “세상에. 말이 안 나온다. 네가 어떻게 이러니? 집안을 그렇게 뒤집어놓고 정관수술까지 하고 들이민 결혼을 해놓고.”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오래 만났는지, 왜 만났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도호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도 맥주 한 캔을 따서 천천히 마셨다. 

 내 눈을 의식하지 않고 도호가 울 수 있도록 머리를 최대한으로 젖혀 천장에 눈을 꽂고 천천히 마셨다. 

 

 

 

***

 

 

 도호와 올케는 온라인 중매 사이트에서 만났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사이인데도 연결된 것을 보면 도호가 상대의 나이 선호 선택란에 특정한 요구를 한 것인지, 아니면 데이터의 오류로 만나게 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도호는 우리 나이 또래보다 좀 더 듬직해 보였고, 올케는 그때만 해도 호리호리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매력적이었다. 도시 냄새가 나지 않는 엉성한 세련미도 독특했다. 둘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커플이었다.

 나는 올케가 싫지 않았다. 

 노처녀로 나이를 먹어가는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올케를 새 식구로 온전히 환영했다. 도호가 정관수술을 하고 나타나서 결혼을 통보했을 때 식구들 모두 그의 도발적인 행동에 분해하고 황당해했지만 나는 달랐다. ‘쌍둥이 아니랄까 봐 도호를 두둔한다’라며 말들이 많았지만, 도호는 그의 결혼에 반기를 들지 않은 나를 고마워했다. 

 올케는 요즘 사람 같지 않게 호칭이나 존칭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올케는 내가 여덟 살이나 어려도 도호의 손위 쌍둥이 누나라며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지 먼저 의논해왔다.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언니 동생 하기도 그러니, ‘누나씨’라고 하면 어떻겠냐는 제의에 나는 만족했다.

 도호는 그때나 지금이나 외면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흰머리만 고등학생들 새치 나는 정도로 듬성듬성 보일까 말까 할 정도일 뿐 세월을 잘 피해 가는 듯했다. 반면, 올해 쉰다섯 살이 된 올케는 많이 변했다. 아이를 낳지 않은 몸이라 그런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더라도 확연한 중년티가 났다. 하이힐을 기억하는 발꿈치가 엇박자를 내며 단화에 닿는 충격으로 골반을 약한 뒤로 빼며 걷는 모양새라든지, 허리 주변에 스웨터나 블라우스가 엉성하게 끼어 울퉁불퉁한 살의 윤곽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특유의 손동작을 보면 대형 마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보통의 동네 아줌마를 연상케 했다.

 

 올케랑 나는 자주 만났다. 

 올케가 시댁 식구 중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올케의 나이가 주는 안정감이 좋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를 안전하게 유지하며 올케랑 친해졌다. 올케 앞에서는 노처녀로 나이 들어가는 위축감 없이 자유롭게 젊음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올케는 여자가 늙어가는 과정에 대해 굉장히 솔직했다. 보통의 여자들이 산부인과 정기 검사 때나 할까 말까 할 정도의 말도 편안하게 털어놓곤 했다. 오십견이 쉰 살이 되던 해 딱 맞춰서 찾아왔다든지, 쉰다섯이 되면서 생리가 완전히 끊겼다든지, 갱년기 호르몬 양약과 한약을 챙겨 먹고 있다든지, 도호 때문에라도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등의 속사정도 부끄럼없이 풀어냈다. 와인이라도 같이 한 잔 하는 날에는 몇 년 전부터 부부 동반 모임을 꺼리게 되어 도호에게 많이 미안하다며 우울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친정 식구들 모이는 자리까지 슬슬 피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매우 안쓰러웠다. 

 

 “와이프한테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생각이야.”

 도호가 고개를 떨군 채 독백 같은 말을 흩트려놓는다.

 아무리 쌍둥이 동생이라도 내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더구나 미혼인 나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이 많지 않다. 그저 세상의 눈을 피해 울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온 도호를 나무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뿐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가 다 바람을 피우고 배우자를 배신한다 해도 도호만큼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해왔기에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어려운 결혼을 해놓고 이게 무슨…….”

 내 입에서도 독백 같은 말이 거품처럼 나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흘러나온 말이라 나도 당황스러웠다.

 “알아. 나도 이 지경까지 온 내가 용서가 안 돼 차라리…….”

 “야, 무슨 말을…. 나는 그냥, 너무 충격적이니까.”

 “누도 이렇게 충격적이고 황당해하는데, 와이프가 들으면 어떨까? 그 사람, 어떤 충격을 받을지 상상도 안 돼.”

 “돈, 돈만 주면 떠날 여자, 아니니? 그럼 그냥 줘서 보내. I-20 비자 받는다면 어차피 여기 뜰 사람이잖니? 올케가 모르고 살아도 된다면 말이야. 내 말은, 모르고 사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도박이야, 안 돼. 누. 돈 챙겨 떠나면서 와이프한테 비밀에 부치고 떠날 거라는 보장도 없어.”

 “너 올케랑 괜찮니?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각자 다른 페이스로 나이 먹어 갈 거라는 거,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잖니.”

 “모르겠어, 뭐가 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가속도로 젊음을 잃어가는 와이프가 가끔 생소하지만, 절대 소원해진 사이는 아냐.”

 “그런데 왜?”

 “나도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도호는 진정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실수, 큰 실수. 그는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올케한테 얘기하지 마.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 문제잖아. 지금 폐경, 갱년기, 호르몬 약…. 나이 들어가면서 몸에 일어나는 문제가 한두 가지 아닐 텐데 우울증 치료까지 받게 할래? 그 여잔 어차피 I-20 비자 받으면 떠날 거고. 돈은 뭐, 조용히 사라지기만 한다면 위자료라 생각하고 줘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또 알아? 정말 은행잔고증명서 뗀 후에 다시 돌려줄지?”

 “와이프한테 직접 연락할 수도 있다는 그 여자의 말, 그냥 흘려버릴 수 없어.”

 “그래, 불안한 일이지.”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거, 알아. 문제는 말이야, 내가 먼저 얘기하는 것이 날지, 아니면 와이프가 알게 됐을 때 용서를 비는 것이 날지 모르겠어. 어떤 쪽이 충격을 덜 줄지, 어떤 쪽이 덜 상처가 될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남편의 여자 문제, 난 모르고 싶은 것 같은데. 알아서 좋을 게 뭐 있어? 일은 다 저질러놓고 자기 양심까지 완벽하게 챙기고 싶어서, ‘실토했으니까 용서는 너의 몫’이라고 떠미는 것밖에 더 돼?”

 “누, 그런 거 아냐.”

 “올케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는 거야. 그렇잖니? 너는 잘못했다고 할 거고, 용서해달라고 할 거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 할 거고, 매달리겠지.”

 “그래야지.”

 “그런데 거기서 뭐라고 해? 올케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어? 깽판을 치고, 때려 부수고, 집어던지고, 가슴을 치면서 발광을 하고. 그것밖에 더 있어?”

 “...”

 “그러다가 ‘8살 연하랑 살면서 그 정도 문제도 없이 인생 순탄하게 갈 줄 알았냐’고 자책을 하겠지. 쉰다섯 살 먹은 여자가 집 박차고 나가서 이혼하기도 어려운 노릇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미치게 만드는 거잖아?”

 “알아.”

 “그렇게 사람 미치게 할 거면 난 속이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

 

 미혼인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올케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거다. 도호랑 결혼을 결정하면서 이런 일 정도는 미리 각오하지 않았을까? 정관수술까지 하고 자기를 선택한 도호이기에, 한 번쯤은 너그러이 눈감아주고 모르는 체하지 않을까? 생리가 끊기고, 갱년기가 찾아들고, 온몸과 마음에 주름이 겹겹이 거미줄 칠 때 차라리 이런 치부는 스스로 감추고 싶어 하게 되지 않을까? 늘어지는 뱃살과 가슴살을 들키기 싫어 잠자리조차 싫어지는 나이가 될 때 다른 여자 만나서 젊음을 널고 오는 도호를 한 번쯤은 눈감아주지 않을까? 아닐까? 나의 상상이 너무 멀리 간 걸까?

 

 “속이고 살 순 없어.”

 “속이는 게 아니고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뿐이야. 그 나이에 그 충격, 주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잖니?”

 “그건 와이프를 두 번 죽이는 거야.”

 “한 번도 죽이지 않고 살게 할 수도 있어. 끝까지 모르고 갈 수도 있다고!”

 “충분히 잘못했어. 내 입을 통해 알게 하는 게 최선이야. 다른 방법이 없어. 와이프, 가슴 아프게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울 따름이야.”

 “그러나저러나, 올케 요즘은 어때? 너한테 이상한 눈치 같은 거,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은 다니고? 곧 그만둔다고 했잖아?”

 “그만둔 지 한 달 됐어. 평생 외국에 한 번 안 나가본 사람이 해외여행 패키지 투어만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에서 30년을 일했어. 이제 좀 쉴 때도 됐지. 최근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거든.”

 “글쎄 말이야. 올케는 여권도 없다며? 해외여행 한번 안 가보고 어떻게 여행사에서 그리 오래 일을 했다니? 대단해.”

 “고지식하게 성실하고 불필요할 정도로 친절한 여자야. 여행사 직원들하고 짜장면 배달해 먹고는 그릇을 초벌 설거지로 깨끗이 씻어주는 여자야. 착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각별해. 콩나물국 끓이는 날에는 콩나물무침, 미역국 끓이는 날에는 늘 미역초무침이 반찬으로 올라와. 낭비가 없어. 예측 가능해서 편안해. 검소해. 평범해. 깔끔해.”

 “너도 괜찮은 남편이야. 올케도 너 아니었으면, 그 나이에 결혼에서 이런 사랑 받고 못 살아.”

 “사랑이 아니라 상처를 줬어.”

 “올케가 모르고 지나가면 돼. 앞으로 더 잘해주면 되잖니.”

 “다른 여자 만난 나를 받아줄까?”

 “받아주지 않으면, 올케 그 나이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생활력 강한 여자야. 혼자서라도 잘 살 수 있는 여자야.”

 “물론 올케도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리 쉽게 극단의 결정을 할 여자는 아니잖니? 그 나이에 이혼이 쉽니?”

 “그게 더 두려운 일일 수도 있지.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고 버티는 거.”

 “젊은 여자, 품으니까 달랐니? 좋았니? 왜 그랬니?”

 “실수였다고 했잖아, 실수.”

 “너 실수라는 말이 참 쉽다.”

 “알아.”

 도호는 성내지 않았다.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더 초라해 보였다.

 “더 잘 해줘. 그러면 돼. 그냥 넘어가. 돈은 내가 그 여자 따로 만나서 전해주는 것으로 할게. 그리고 정리하면 돼.”

 “고마워. 돈, 돈 문제만 일단 해결해놓고……. 조금 시간을 벌려는 거야. 와이프한테는 내가 곧 얘기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

 “늦었다. 나 이제 가야겠다.”

 “그래.”

 

 도호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 도호 핸드폰이 정신없이 울다가 끊겼다.

 올케이거니 했다. 

 또 화들짝 울렸다. 

 혹 그 여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화 왔었다.”

 말쑥하게 세수를 하고 나온 도호는 지금까지 울면서 찌든 마음을 토해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단정하고 밝았다.

 도호는 전화기를 확인해보며 소연이가 전화했다고 했다. 

 전화는 다시 울렸다.

 “어, 소연아. 삼촌이야. 집이니?”

 

 “뭐? 뭐라고? 그, 그래서? 어, 그래, 아, 알, 알았어. 알았어. 곧 갈게.”

 

 “왜? 무슨 일이야?”

 “와, 와이프가 쓰러졌대. 소연이가 지금 집에 들어와서 제 외숙모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대. 지금 응급실로 이, 이, 이송 중이래.”

 “뭐?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니?”

 “나 갈게.”

 “어디로? 어느 병원?”

 

 ‘연락할게’라는 말은 도호가 급히 현관을 빠져나간 후에, ‘쿵’ 하는 문소리와 섞여 퍼졌다. 나는 바로 뒤따라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호의 불안한 뒷모습에 대고 ‘연락해,’ ‘나도 곧 병원으로 갈게’라는 소리만 내지르고 급히 나갈 준비를 했다. 혹시 그 여자가 올케한테 전화한 건 아닐까? 그 충격에 쓰러진 건 아닐까? 마음만 급해졌다.

 

 

***

 

 

 “도호니? 나야. 어디니? 어느 병원이니?”

 갑작스러운 심근경색. 다행히 소연이가 일찍 발견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수술 경과를 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누, 올 것 없어. 와서 있을 곳도 없고, 수술 후 병실이라도 정해지면 그때 와. 그런데 부탁이 있어.”

 “뭔데?”

 “구급차 대원이 작성한 노트를 보니까, 와이프가 손에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는데….”

 “쓰러졌을 때 말이야?”

 “응. 소연이도 제 외숙모가 서재에 있는 컴퓨터 책상 밑에 쓰러져있었다고 했거든.”

 “간호사도 요즘 무슨 심한 스트레스나 충격받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더라고. 심장병이나 다른 지병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마우스를 쥐고 있는 상태로 쓰러졌다면….”

 “혹시 몰라서…. 그 여자가 와이프한테 연락을 했거나 이메일을 보냈을지도 몰라서.”

 “알았어. 내 짐작도 그래. 내가 너희 집에 한번 가볼게. 컴퓨터가 켜져 있을 테니까.”

 “우리 집 자동키 번호, 문자로 찍어 보낼게.”

 “그래, 알았어. 너랑 올케 옷도 좀 챙겨 갈게. 이따가 병원에서 보자.”

 

 

 sweethome#. 삐삐삐삣 삣삐리리리. 쿵.

 자동키 소리는 어느 집이나 똑같다. 필요 이상으로 경쾌한 소리로 집을 토해낸다. 소연이 머무는 방은 임시로 꾸며서 그런지 하숙방 같은 느낌이 나지만 그 외의 집 분위기는 말 그대로 ‘sweethome’이다. 부부가 쓰는 방, 서재, 그리고 소연이가 잠시 쓰고 있는 손님방. 넓은 부엌에 아담한 거실. 깔끔한 인테리어와 소박한 데코는 올케 취향이다. 조금은 촌스러울 정도로 반듯한 도호의 성향도 느껴진다.

 나는 먼저 그들이 서재로 쓰고 있는 방으로 갔다.

 올케가 쓰러질 때 마우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마우스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고, 건전지 덮개 부분이 깨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마도 올케 손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깨진 것 같다. 

 마우스가 없으니 키보드를 사용해 컴퓨터를 슬립 모드에서 깨워본다.

 딴따라딴딴 딴딴따라.

 컴퓨터 화면이 폭죽을 터트리며 축하 메시지로 장식된다.

 축하 노래도 흘러나오는데 볼륨이 너무 커서 화들짝 놀랐다. 

 이 정도의 볼륨이라면 놀라지 않을 심장이 없겠다 싶었다. 

 

 ‘축하합니다. 고객님께서 입력하신 프로파일과 100% 일치하는 분을 찾았습니다. 다음 버튼을 누르시면 개인신상정보를 확인한 후, 이메일로 비밀번호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신 후 열리는 새로운 창에서 상대의 프로파일, 사진, 연락처 등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 e사랑 온라인 중매 사이트를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의 동반자를 찾으신 고객님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 e사랑 온라인 중매 사이트 고객상담 담당자 ---’

 

 나는 컴퓨터 화면에 뜬 메시지를 도호에게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도호야, 이게 무슨 소리니? e사랑 온라인 중매 사이트에서 올케랑 100% 맞는 배필을 찾았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니?”

 “뭐?”

 “지금 올케가 마지막으로 연 컴퓨터 창을 보니 그렇다는데, 이게 무슨 소리니?”

 “와이프가?”

 “너희가 만난 것도 온라인이잖아? 이 중매 사이트에서 만난 거 맞지? 그런데 올케가 어째서 아직도 이 사이트에서?!”

 “100%라고?”

 “그래. 올케가 입력한 조건에 100% 맞는 사람을 찾았대. 그럼, 그 여자에게서 온 협박 편지를 읽다 쓰러진 것이 아니고, 이 메시지를 보고 놀랐던 바로 그때 절묘하게 심장에 무리가 왔다는 거니?”

 “누, 컴퓨터에서 몇 가지 좀 더 확인해 줘.”

 “그, 그래.”

 

 나는 도호가 주는 패스워드로 하라는 대로 몇 가지 정보를 찾아 캐고는, 두 사람이 갈아입을 옷가지를 대충 챙겨서 sweethome아닌 sweethome을 급히 빠져나왔다.

 

 

***

 

 

 “수술은, 아직 안 끝난 거니?”

 도호는 수술실 옆 보호자 대기실에 있었다.

 “응, 좀 걸릴 거라고 했어.”

 “걱정하지 말고 누는 이제 가. 내일 출근해야잖아.”

 “됐어.”

 “수술 끝나고 나와도 회복실로 가게 될 거고, 보통 병실로 언제 옮기게 될지 몰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 혼자 가니? 소연이가 도랑 언니한테 연락했나 봐. 내일 새벽에 올라온다고 하더라.”

 “커피라도 해.”

 도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호자 대기실에 걸려있는 둥근 벽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너는? 커피라도 갖다줘?”

 “아냐, 됐어.”

 “어떻게 된 거니? 아까 그 패스워드 넣어서 찾은 정보로 뭣 좀 더 알아봤어?”

 “아니. 와이프가 예전에 날 만났을 때 쓰던 아이디로는 안 돼. 새로 아이디를 만들어서 썼나 봐. 100% 매치는 확실한 데,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가 없어. 와이프가 쓸만한 비밀번호 몇 개 넣어봤지만 안 됐어.”

 “이게 무슨 난리라니? 올케가 왜 그런 중매 사이트에서 사람을 찾는다니?”

 “전혀 몰랐던 일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가! 나랑 살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이것도 엄연한 외도야. 정신적 외도. 어떻게 너 같은 남편을 두고 세상에….”

 “누, 들어가. 늦었어. 그리고 이번 주 안에 송금 부탁해. 내가 돈 마련해놓을게.”

 “그 여자?”

 “마무리를 지어야지.”

 “일이 이렇게 된 지경에, 그 여자 뭘 믿고 돈을 해주니? 올케한테 말하려면 말하라고 해. 너는 그 여자, 올케는 이 중매 사이트 건, 둘 다 똑같은 처지인데.”

 “와이프 깨어나서 안정 찾게 되면 그때 내가 천천히 말할게.”

 “올케가 이렇게 네 뒤통수를 치다니! 올케가 쉰다섯, 쉰다섯이라고. 젊은 너를 두고 뭐가 모자라서, 그 나이에 정말 기가 차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너는 올케 때문에 정관수술까지 했어. 다른 속도로 늙어가는 사람하고 살면서 한 번 실수 할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 넌 젊은 피에 실수한 거라면, 올케는 철저히, 오랫동안 계획적으로 준비해온 외도라고!”

 “누, 그렇게 단정 짓지 마. 와이프가 왜 온라인 중매 사이트에 접속했는지, 무얼 했는지, 누굴 만났는지, 어떤 사람을 찾았는지….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으니까….”

 “확실한 게 왜 없니? 100% 매치되는 사람을 찾았다잖니? 그 기쁜 충격에 심장이 반 멎어서 쓰러진 거 아니니? 참, 세상에 이렇게 배신을 하다니…….”

 “그만해.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누. 그 사람 깨어나면 천천히…. 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여자 얘기, 꺼내기 쉬울 것 같아.”

 

 나는 도호를 혼자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그냥 대기실에 오래 앉아있었다. 간호사가 올케의 수술이 잘 돼서 회복실로 옮긴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도호는 안도의 눈인사만 남기고 재빨리 간호사를 따라 나갔다. 양심을 회복이라도 하려는 듯, 복도 끝으로 내달리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한 사람은 잘못된 만남을 끝내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잘못된 만남을 시작하려고 하던 하루가 함께 사라졌다. 아무리 빅데이터 시대라고 해도, 100% 매치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올케와 100% 매치하는 온라인의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궁금해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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