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펜

조회 수 19 추천 수 0 2026.09.23 19:47:49

형광펜

 

유경순

 

구석으로 굴러간 플라스틱 뚜껑은

먼지 속에 누워있고 

잉크 냄새 밴 그 애는

지쳐버린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나온다.

 

모서리가 접힌 책장에 

몸을 밀착하고

꾹 눌러 

한 줄을 그어버릴 때

비로소 그 애는

밤을 만났다.

 

책 속 이름 모를 물고기가 바닷속을 헤매고

파도 위를 지나는 배가 밑동을 보일 때

그 애는

서서히 날개 없이 날며

책 가운데 골짜기에 눕는다

 

몇 날이 지났을까

구석에서 만난

그 애의 분신은

 

소리 나지 않는 빛깔이 되어

 

작은 모서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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